[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12.31 0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월의 묘비

  '진달래꽃' 초판 경매, 1억3500만 원 낙찰…

  통일의 봄이 온다면 김소월 생가·묘지가 북녘 첫 문학기행지


  지난 19일 한 현장 경매에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이 올랐다. 그가 살았을 적에 낸 유일한 시집이다. 1925년 초판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그 책은 1억3500만 원에 낙찰이 되어 화제를 키웠다. 어떤 이는 시집 한 권에 1억 원을 넘다니 하고 놀랄 것이다. 오늘날 나라 안에서 네 권밖에 확인되지 않은 희귀본이니 낙찰가가 오히려 싸다고 여기는 이도 있겠다. 그런데 남북한 모두에서 사랑받고 있는 세 손가락에 꼽힐 겨레 시인이 소월이다. 어찌 돈의 높낮이로만 값을 잴 수 있으랴.

  소월은 1903년 10월 16일 평안북도 곽산군 남산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왜로 일꾼에게 맞아 폐인으로 사는 모습을 어린 눈으로 익히며 자랐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정주 오산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기미만세의거에 참가했다. 오산학교 폐교로 서울로 내려가 배재중학에서 학교를 마쳤다. 처가의 도움을 받아 동경 유학을 떠났으나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이른바 관동대지진이라 일컫는 1923년 계해년 재왜동포 참변을 몸으로 겪고 공부를 접었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어!"라 외친 시 '초혼'은 그때 숨져간 동포에 대한 진혼임을 밝힌 눈 밝은 비평가도 있다.

  고향에 돌아와 농사에, 신문사 지국에 생계를 맡기고 시작에 골몰했다. 그러다 1935년 12월 24일 소월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좌절과 비통에서 일어서지 못했던 까닭이다.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배기에 묻혔다. 그런데 1956년 4월 5일, 소월의 무덤에 묘비가 세워졌다. 해묵은 북한 잡지 '청년문학' 1956년 5월 치를 한 장 한 장 뒤적거리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묘비 건립식과 추모식이 이루어진 그날 조선작가동맹을 대표해 평양에서 시인 박세영 김북원 김우철이 왔다. 곽산의 사회단체 대표, 학교 문학모임 회원, 소월의 친인척과 마을 사람이 200명 남짓 모인 자리였다.

  소월의 무덤은 푸른 숲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앉아, 남향으로 서해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소월의 표현대로 '차 가고 배 가는' 아름다운 곳. 묘비에는 '애국시인 김소월 여기 잠들다'라 적었다. 마을 청년단원들이 무덤 둘레에 돌을 쌓아 올려 번듯한 잔디 터를 닦아 놓았다. 장차 그곳을 공원으로 가꾸겠다는 뜻을 담은 일이었다. 거기다 탐스러운 진달래꽃을 포기포기 옮겨 심었다. 감격과 흥분 속에 추모의 정을 담은 시낭송까지 이어졌다. 그날 모임 끝 순서는 시인의 둘째 아들 김은호가 친족을 대표해 나선 답사였다.


  김일성의 유일 체제로 바뀌기 앞선 시기였던 1950년대만 하더라도 소월은 남북한은 물론 중국 동포사회와 소련에서도 시집 출판이 이루어진 유일한 시인이었다. 존경 받는 시인이었지만 북한의 이해 방식으로 볼 때 소월 시가 지닌 한계 또한 뚜렷했다. 계급의식으로 무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겨레 항쟁에 투철한 전망을 지니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앞날에 대한 꿈과 바람, 그의 시가 담고 있는 민중성, 형식의 다양성, 생동하는 표현, 풍부하고 아름다운 시어를 그들은 높이 샀다. 북한 시의 디딤돌로 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던 셈이다.

  소월은 노래했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가지런히/밭갈이 하루 일을 다 마치고/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바라건댄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그러한 소월의 꿈과 바람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준렬한 절창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그의 시에 위로 받고 격려 받았던 것인가. 그런 소월을 오산학교 후배인 백석이 그리워했고, 그 백석의 시를 젊은 윤동주는 서울 하숙방에서 베껴 적었다.

  이른바 혁명 전통과 위대한 수령, 둘을 빼고 나면 남을 게 없을 듯 싶은 게 오늘날 북한지역 역사 기술의 현실이다. 근대 100년 긴 세월의 격동과 신산을 온몸으로 겪었던 예사 북한 사람의 삶과 땅의 기억은 그 밑에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남북은 지난날을 함께 되새기며 새로운 통일 풍속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푸르디푸른 만산 우듬지처럼 그것들이 끓어 넘치고 해방될 새 아침이다. 그리고 그 일에 소월의 시가 좋은 부싯돌 역할을 하리라.

  이승을 뜬 지 스무 해가 지나 세워진 묘비였다. 오늘은 묘비가 세워진 지 다시 예순 해를 바라보고 있는 2015년 12월 해밑이다. 소월의 무덤은 아직 남아 있을까? 묘비는 어떤 키로 서 있을까? 통일 되면 처음 떠날 북녘 문학 기행 자리로 소월의 무덤을 떠올릴 사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슬픈 시대의 벽 앞에서 젊은 나이로 걸음걸이를 접었던 소월. 소란스러운 경제와 지리멸렬한 정치가 무성한 겨울 한가운데서 그는 환한 진달래 꽃길을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열어 보이고 있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12월 31일 (목)자 31면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