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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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12.2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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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의 시인정조… 수원화성·26·끝] 지지대에서 한없이 머무르다

  父 사도세자에 세자 책봉 고하는 기쁨


  환궁길 망설이는 심경도 담겨져

  최후 예감한 듯 ‘마지막 자작시’

  1800년 경신년 1월 1일 원자를 왕세자로 삼은 정조는 보름날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든 현륭원에 나가 이를 고하고 화성 행궁의 봉수당에 유숙한 다음 1795년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사용한 운자를 빌어 다음 시를 썼다.

  이를 장락궁 동쪽 문미에 제한 것은 음 17일이다. 정조는 지병이 악화되고 있었던 상황이라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에 왕세자를 정해 후대를 잇는 조치가 가장 중요했으며, 이를 조상에게 고하는 기쁨을 말한 것이 이 시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시가 정조의 마지막 시가 됐다는 점이다. 결구에서 지지대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나라 삼선과 한나라 중리를 겸해 / 周家三善漢重

  마침내 생민과 하무의 시를 얻었구나 / 遂續生民下武詩

  현륭원에서 큰 명 받들어 예를 행하고 / 禮廟殿宮承駿命

  천만억년 큰 복 경사스럽게도 받았으니 / 慶千萬億受鴻祺

  이번 행차는 한없는 기쁨 말씀올림이니 / 今行欲報无疆喜

  이날은 숙박 없이 돌아오기 어려웠어라 / 此日難爲不思

  새벽녘 화성 떠나 고개 돌려 바라보매 / 明發華城回首遠

  지지대에서 또 오래 머무르며 망설이네 / 遲遲臺上又遲遲

  위의 시에서 삼선(三善)은 세자가 국학에 들어 가 부자(夫子)·군신(君臣)·장유(長幼)의 세 가지 도리를 알게 된다는 말이며, 중리(重)는 광명이 이어진다는 뜻으로 역시 세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문면으로 보아 세자로 책봉된 원자가 정조와 함께 동반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민(生民)과 하무(下武) 모두 시경에 나오는 고사로 주나라 시조 후직(后稷)과 한나라 무왕의 성덕(聖德)을 찬양한 노래를 지칭한다.

  세자를 책봉하고 그와 함께 이를 선조에게 고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루를 유숙하고 나서도 지지대에서 환궁하지 못하고 한 없이 망설이는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 이 작품이다. 아마 정조는 여기서 그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제왕도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정조의 면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정조는 이 시를 쓰고 약 6개월 후인 1800년 6월 28일 영춘원에서 승하했다.

  정조의 승하와 더불어 조선 왕조는 19세기 역사적 선택의 길목에 들어서지만,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적 격변과 세도정치로 인해 유학의 정통을 지닌 왕조를 지켜내지 못하고 쇄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위 글은 경인일보 2015년 12월 28일자에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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