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칼럼] 김근식 교수
[중앙일보 칼럼] 김근식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11.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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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체제 담론 우리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8·25 합의 이후에도 남북관계는 교착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군사적 대치와 긴장은 여전하다. 서해와 휴전선은 아직도 팽팽한 대결의 공간이다. 일상에서도 한반도는 언제든지 군사적 충돌을 각오하고 대비해야 한다. 지난여름 휴전선에서의 긴장 고조는 48시간 내에 대화냐 전쟁이냐를 결심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세계 10위 교역국가가 전쟁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은 분명 비정상의 극치다. 그럼에도 언제부턴지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용어가 사라졌고 국정과제에는 평화체제 대신 통일기반 구축이 자리 잡고 있다. 전쟁이 하시라도 가능한 불안한 정전체제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만들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않는 분위기다. 한반도의 현실은 어느 때보다 평화를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평화 담론은 북한의 용어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평화체제가 필요하다면 우리의 용어와 담론으로 북한을 설득해 우리 주도의 한반도 평화를 일구어내야 한다. 북이 쓰는 용어라서 논의 자체를 주저하는 것은 평화의 절박성에 비한다면 직무유기에 불과하다.

 평화체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북한의 주장이 주한미군 철수를 목적으로 한다는 지레짐작이다. 1974년 북·미 평화협정 주장 이후 84년 3자회담 제안과 96년 4자회담 개최까지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철수를 연계시킨 게 사실이었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주한미군은 나가야 한다는 상투적 논리였다.

 
 그러나 지금 북한의 평화체제 제안은 그때와 다르다. 2차 북핵 위기 이후 북한은 공식적으로 평화체제와 북핵 해결을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2005년 7월 22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평화체제 수립이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근본 노정’이라는 입장을 공식화하고 과거 평화체제와 주한미군 철수 연계 주장을 포기했다. 오히려 북핵 해결의 전제조건으로 당시 주장했던 대미 불가침 조약 체결이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해소로 간주한다는 상당히 실용적인 접근이었다. 평화체제와 북핵 해결의 결합이라는 북한의 입장은 이후 9·19 공동성명에 비핵화 프로세스와 평화체제 프로세스를 동시에 담는 기초가 됐다.

 실제로도 북한은 중요한 고비마다 주한미군 주둔 허용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한국전쟁 이후 북·미 간 최초의 고위급 접촉이었던 92년 김용순 비서와 아널드 캔터 국무차관의 회담에서 북은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의 주한미군 주둔 허용 입장이 재확인됐음은 임동원 전 장관의 회고록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북한을 방문한 미국의 최고위급 인사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2000년 10월 김정일이 ‘주한미군의 주둔 필요성’을 인정했다고 회고했다. 대남 선전용의 주한미군 철수 담론과 달리 최고위급의 정책 당국은 대북 적대관계가 아닌 평화유지군으로서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안정과 동북아 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평화체제 논의를 주저하는 두 번째 오해는 북핵 문제 해결 없이 평화체제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북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체제 협상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체제 논의는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게 아니라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2005년 이후 북은 평화체제 수립과 비핵화를 맞교환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10년 1월 10일 외무성 성명은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평화체제 논의가 누락됐던 점이 6자회담 실패의 원인이라고 진단하면서 ‘평화협정이 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비핵화를 빠른 속도로 적극 추동할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북한에서 평화체제 협상이 반드시 병행돼야 비핵화 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인 만큼 향후 북핵 문제는 평화체제를 우회하기 어렵게 돼 있다.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상존하는 전쟁 위기를 해소해야 하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도 정당하고 필요하다.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북핵 문제 해결과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도 평화체제 협상을 피해갈 수 없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말려든다는 근거 없는 냉전시대의 오해는 이제 불식해야 한다. 오히려 평화체제 논의를 우리가 적극 주도함으로써 협상 테이블에 우리의 어젠다를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한다.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군사회담이야말로 우리가 당당하게 핵 포기를 요구하고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의 사과를 요구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국방위 중대담화와 특별담화를 통해 군사적 대결 중단과 긴장완화를 위한 고위급 군사회담을 제안해 놓고 있다. 군사 어젠다를 논의하자는 북의 제안에 우리가 소극적일 이유는 전혀 없다. 2007년 ‘종전선언’이라는 우리의 평화 이니셔티브가 성사됐던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가 평화체제안을 마련하고 워싱턴과 베이징을 설득하고 북한과의 평화체제 협상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평화는 북한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담론이자 시대적 소명이 되어야 한다.

 

<위 글은 중앙일보 2015년 11월 20일(금)자 33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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