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교수
[경인일보 칼럼] 최동호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8.0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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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밤 詩作

  ‘간신배들 반드시 구별’ 의지담아


  동궁시절 살해위협에 밤새 ‘뜬눈’

  무능한 신하 조롱 당나라 고사 인용

  세손 시절의 정조가 처음 동궁이라 지칭된 것은 사도세자 사망 직후인 1762년부터다. 정식으로 동궁에 책봉된 것은 1765년이다. 동궁 책봉 이전에 동궁이라 지칭한 것은 후사의 공백을 두지 않으려는 영조의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 시는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보고 침소로 가다 느낀 소회를 시로 표현한 것으로, 동궁 시절 정조의 솔직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후일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이 동궁 시절 살해 위협을 느껴 새벽까지 옷도 벗지 못하고 자리에도 들지 못한 적이 많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잘 곳조차 정하지 못했던 적적한 심정을 시로 남겨 가장 가까운 한 사람에게 보여줬다.

  용루에 잠자리를 정하고 나니 定寢龍樓訖

  동궁으로부터 막 돌아온 때로다 歸自靑宮畔

  가을 하늘은 어찌도 그리 높은가 秋天一何高

  밤하늘의 은하수 선명도 하구나 的歷明河漢

  옷자락 걷고 중당으로 걸어가니 衣步中堂

  밤이슬이 구슬과 같이 빛나고 白露如珠爛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상 사람들은 滔滔世之人

  이 시간 그 꿈을 반도 못 이루고 此時夢未半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저물면 쉬어 朝營暮則歇

  기뻐하며 장주 나비가 되었으니 莊蝶亂

  기린원이 바로 귀감이 될 터이니 麟卽龜鑑

  이 길고 긴 밤을 내 어찌할 것인가 其奈長夜漫

  -‘밤에 앉아서 무료하여 이 시를 읊어서 어떤 사람에게 보이다’

  장자(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됐는데, 깨어 보니 꿈속의 나비가 자기 자신인지 깨어난 자기가 자기 자신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기린원 이야기는 조정의 무능한 신하들을 조롱한 당나라 양형의 고사를 인용했다.

  지금 깊이 잠든 백성들은 간신배 무리를 구별하지 못해도 자신은 이를 가려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아마 후일을 도모하는 시라면,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동궁으로선 정말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시였을 것이다. 시적 문맥에서는 ‘밤이슬이 구슬과 같이 빛나고’라는 구절의 이미지가 새롭다.

 <위 글은 경인일보 2015년 8월 3일(월)자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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