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7.1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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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의 부왜시(附倭詩) '수'와 조상지 장군

  북만 항왜투사와 일제 옹호하는 詩를 쓴 청마

  같은 시대 살았지만 너무나 다른 삶

  최 형. 답신을 드린 지 세 주가 지났습니다. 한 젊은 연구자가 쓴 글을 읽고 보내 주신 노기 띤 전자편지였습니다. 유치환 문학에 대해 전향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한 저의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첨예한 논쟁을 피해 가면서 현학만을 되풀이했다는 판단이셨습니다. 그런 모습은 어제오늘 학계의 인습이 아닐뿐더러 그 한 개인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저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그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놀랐습니다. 제 글과 생각을 비껴 간 정도가 아니라, 특정 핵심 자리에서는 제 생각의 속살을 자기 식의 현란한 표현으로 바꾼 뒤 자기 것인 양 끌어다 썼던 까닭입니다. 표절이라 할 수는 없으되 도용에 가까웠습니다. 게다가 말씨는 왜 그리 일본식 번역투를 즐기는지. 마침 저는 '수'와 관련이 있는 옛 만주국 서울 신경, 곧 장춘에 논문 발표를 위해 와 있습니다. 

  유치환이 '수'에서 한껏 꾸짖고 능멸했던 동북항왜연합군 총사령 조상지 장군의 머리뼈를 찾은 곳이 바로 이곳 반약사 뒤뜰입니다. 지난 2004년의 일이었습니다. 1908년 중국 요령성 조양현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군은 17살에 공산당원이 되었습니다. 두 차례나 옥살이를 겪고, 1931년 왜로가 본격적인 만주 침략을 꾀하자 의용군으로 참가했습니다. 1933년부터는 할빈 동쪽 주하에서 주하동북반왜유격대를 출범시켰습니다.

  장군은 그것을 뒷날 동북항왜연합군 제3군으로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왜로와 싸움에서는 타협을 몰랐던 장군입니다. 두 차례나 당적을 빼앗기면서 북만의 대표 항왜 투사로 우뚝 섰습니다. 왜로는 항왜반만군과 일반민 사이 고리를 끊고 안정적인 군량미 공급을 위해 북만에 이른바 집단부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부터 흩어져 있던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들여 유격 근거지를 무인구로 바꾸는 꾀를 쓴 것입니다. 

  유치환이 고향을 쫓겨나듯 떠나 농장 관리인이자 협화회 간부로 처음 짐을 푼 곳이 중국 연수현 가신촌입니다. 이른바 토벌 중점 지역에 마련된 집단부락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장군은 1934년에 이어 1938년에 다시 시작된 이른바 대토벌로 밀영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오히려 1년 6개월 동안 꼼짝없이 감금되는 곤욕을 당했습니다. 

  다시 싸우기 위해 흑룡강을 건너 북만으로 들어섰던 장군은 석 달 만에 밀정의 꾐에 빠져 사살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1942년 2월 12일. 서른네 살 푸른 새벽이었습니다. 왜로는 장군의 머리를 작두로 자르고 몸은 송화강에 던졌습니다. 유치환이 장군을 만난 때가 그 무렵입니다. 머리만 내걸린 '대비적 우두머리' 조상지 장군을 한껏 능멸하는 '수'를 써, 그것을 다음 달 '국민문학'에 실었습니다. '만선일보'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보내 왜왕을 향한 충성을 새삼스레 다짐한 직후 일입니다.


  광복 뒤 1946년, 장군이 항왜 투쟁의 첫 유격대를 만들었던 주하현에서는 그를 기려 현 이름을 상지현(오늘날 상지시)으로 바꾸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장군의 삶이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다루어지고 책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중국공산당 흑룡강성위원회에서는 당적 회복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군의 머리뼈를 반약사 뒤뜰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만주국 호국 사찰이었던 곳입니다.

  유치환은 광복 두 달을 앞두고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협화회 간부 활동 탓에 처단 받을 것이 분명했던 까닭입니다. 만주국에서부터 익은 애국과 반공의 깃발을 고국에서 다시 쳐들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인이 박힌 악습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1963년에는 '수'가 부왜시임이 문학사에서 기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네 해 뒤인 196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 태어나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같은 하늘과 땅을 누리며 살았으나, 삶은 너무나 맞서는 두 사람입니다. 그러하니 공부를 하면 할수록 유치환은 하찮은 삶에 하찮은 문학을 놀다 간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자신의 지난 잘못은 바로잡고 나은 점은 더욱 키워 삶을 드높이는 길과는 거꾸로 살다 간 이가 그였습니다. 삶이 하찮으니 그 글이 하찮고, 글이 부끄러우니 그 삶이 더욱 하찮아지는 이치입니다. 

  아마 유치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학 취향이 바로 잡히기는 힘들지 모릅니다. 긴 세월 다져진 결과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반약사 앞길에 차들은 끊임 없고 노점상들은 기념품 팔이에 눈빛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너른 장춘의 밤자락이 어디서 그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쯤 환한 새벽이 무릎을 펴며 천천히 일어설 것을 저는 압니다. 최 형,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건안하시길 빌어드립니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7월 16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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