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5.2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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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의 인문학

  똥과 오줌은 다르다. 똥길과 오줌길도 다르다. 똥오줌 뒤섞인 꼴이 설사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몸은 설사로 그것을 일깨워 준다. 이상 신호다. 고치기 위해선 원인을 알아내고 길을 찾아야 한다. 인문학은 여러 공부 가운데서도 세상 살아가는 일에 무엇이 똥인지 오줌인지 설사인지 깨닫게 해 주는 일이다. 똥길과 오줌길을 갈라 보는 눈을 갖추게 한다. 그에 따라 설사를 고칠 길을 공구하는 게 인문학이다. 똥오줌 가릴 줄 모르는 이를 뭣도 모르는 사람이라 일컫는다. 얼치기나 젖먹이다.

  우리 사회에 인문학 위기론이 불거진 때는 어제오늘이 아니다. 스무 해에 가까운 199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대학 인문학 전공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은 인문사회과학 모두에 걸쳐 울림이 커졌다. 이제 나라 단위를 비롯해 시·군, 하다 못해 지역 사회단체까지 나서 시민 인문학이니, 거리 인문학이니 강좌를 마련하고 사람을 끌어 모은다. 대중화에서 나아가 인문학 담론 과잉이라 할 모습이다. 학계의 볼멘소리에 나라의 단기책이 맞장구쳐 사회적 멍석을 제대로 깔아 준 덕분이다. 

  그런데 인문학 위기론의 눈은 인문학 자체로 향한 게 아니었다. 인문학자의 위기가 중심이었다. 똥오줌이 어떤 건지 모른 채, 종이 위 먹물 같은 글발을 날리고 있는 제도권 인문학자에 대한 경고였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 근대 학문 생태계 모두의 위기를 암시한다는 사실이다. 겉꼴만 다를 따름이다. 오랜 양적 팽창에 따른 대학 구조에서부터 학문공동체의 엄밀성과 전문성이 느슨해진 결과다.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로만 따지면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오십보백보 아닌가.

  인문학 소양이 모자라 부패, 불공정, 파렴치, 무책임이 예사롭게 된 것인가. 다른 나라에 역사를 빼앗기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인가. 알아도 몰라도 그만인 지식을 후식처럼 고르고 있을 만큼 삶은 느슨하지 않다. 치명적인 문젯거리다. 울음의 인문학,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 인문학, 진실의 인문학을 대중은 견디지 못한다. 알맞게 간 친 인문학은 순기능이 있음에도 하책에 놓이는 까닭이다. 

  인문학은 처음부터 꾸준하고 치열한 골방의 것이었다. 사전에 이르기를 골방이란 큰방 뒤에 딸린 작은방이나 구석 방, 또는 죽다의 속된 표현이라 했다. 앞선 정의에서 골방이 지닌 공간적 예외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으려는 곳, 세상과 따로 떨어져 오로지할 수 있을 자리라는 뜻이 그것이다. 뒤선 정의에서 시간적 몰입을 읽을 수 있다. 그 일 말고는 다 잊어버릴 정도의 집중을 뜻한다. 그렇다. 우리 인문학에서 시급한 것은 새삼스레 골방 의식을 되살리는 일이다.


  학문적 엄밀성과 전문성은 기존 지식과 통념에 물음표를 치거나, 새것을 더하고 파드는 일에 깃든다. 혁신과 창조가 핵심이다. 숱한 자료가 놓인 도서관도 드나들지 않으면 골방일 따름이다. 정치꾼이나 모리꾼에게 골방은 끼리끼리 모여 이익을 꾀하는 곳이기 쉽다. 그러나 인문학자에게 골방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지방이다. 닫고 들어앉는 순간 거꾸로 눈과 마음은 열린다. 더 깊고 무거운 것은 골방에서 비롯한다. 거리와 다중의 화려한 폭죽 속에는 스쳐가는 자위만 무성할 따름이다.

  골방의 인문학을 위해 급한 일은 둘이다, 첫째, 제도권 학문의 담을 허물고 연구 주체를 넓혀야 한다. 학문 공동체의 패거리주의는 대를 물린다. 달라질 가능성이 없다. 입으로만 평생 교육, 백세 인생 떠들 때가 아니다. 그 일에 가장 많이 골몰한 이가 전문가다. 시민 스스로 수동적 소비자에서 적극적 전문가로 나설 일이다. 우리 지성사의 중요 저술인 임종국의 부왜문학론은 제도권에서 나온 게 아니다. 똥오줌 가리며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공부에 학자와 일반인의 나눔이 무엇이랴. 

  둘째, 꾸준한 공부를 위한 제도 개혁이다. 도이치와 같이 연구를 사회 노동으로 보고 나라가 떠맡을 일이다. 왜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ㄹ, ㄴ 같은 닿소리를 낱말 첫머리에서 죽이고 살아야 하는지 헤아리는 국어학자는 없었다. 왜 고종이 이른바 '이태왕지구'라는 왜왕 신하 이름의 명정을 덮고 묻혔는지 일깨워 준 역사학자는 본 적이 없다. 이른바 조선총독부에서는 왜 퇴계를 추켜세웠던가를 파헤친 철학자도 듣지 못했다. 강단 인문학의 정신실조를 넘어뜨릴 대침이 골방 인문학에 있다. 

  인문학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인문학자여, 골방에서 골로 갈 듯 집중하자. 좋은 낯빛이나 나누는 친교 인문학으로 쏘다니다 말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가 거리로 나설 때는 혁명을 위한 경우다. 혀 깨물 각오를 한 뒤의 걸음길이다. 인문학으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이여, 인문학을 꿈꾸는 젊은이여, 용기를 내자. 그대를 기다리는 골방은 곳곳에 널렸다. 잘 익은 똥오줌 두엄처럼 당장 사회를 이롭게 하면서 살지는 못할지언정, 딸아들을 다시 오랑캐의 노예로 살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위 글은 국제신문 2015년 5월 21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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