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일보 기획특집] 정일근 교수
[경상일보 기획특집]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5.0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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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화려하고 찬란했을 한반도의 노래

  ‘물에 잠겼던 상처는 생딱지처럼 드러나 있다. 다시 길을 만들려는 발길을 거부하는 거대한 진흙땅이다. 진흙의 속성이 여간 드라마틱하지 않다. 물이 빠지고 몸을 드러내면서 무수히 많은 거북등 문양을 만들어 놓았다. 흙과 물과 시간이 만드는 ‘걸작’이 설치미술로 전시돼 있는 셈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위에 새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진흙이 부드러운 몸이었을 때, 그때 찍힌 새들의 발자국이 도망가지 못하고 갇혀버려 함께 굳어가고 있다. 그냥 그대로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 진흙땅이 바위처럼 딱딱해진다면, 그 시간대에 생존할 문명은 바위에 찍힌 거북등과 새 발자국의 그림 앞에서 답을 찾으려 오래 고민할 것이다. 암각화에 새겨진 선사시대의 패스워드를 모르는 이 시대처럼.

  견해는 견해일 뿐이다. 해답이 없는 바위그림 앞에서 팸플릿에, 안내판에 적혀 있는 학자들의 견해들에 동조할 이유는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식으로 생각한다. 저건 칠판일 수 있고, 저건 시일 수 있다. 선사시대 한 열정적인 선생님이 칠판에 동물농장을 그려 놓고 아이들에게 신나는 자연수업을 했을 수 있고, 선사시대 한 시인이 거대한 서사시를 새겨 적고 가슴이 벅찼을지 모른다.

  1992년 경남도 소속 울산서 반구대 암각화는 기념물 취급

  1995년 국보로 지정되기까지 안내판도 제대로 설치 안해

  암각화박물관 거센 반대…문화자원 활용서도 한발 늦어

  반구대 암각화 보존문제는 전문가의 몫으로 돌려야

  암각화 앞에서 상상력을 제한받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무릇 암각화 앞에서 해석만은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친근하게 선사인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찾은 자료를 신봉하는 일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자료와 견해에서 자유로워지면 반구대암각화의 그림들은 참 재미있다. 고추를 빳빳하게 세우고 서있는 선사인이 있고, 새끼고래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가 있다. 그리고 선사인의 얼굴이 있다. 삼각형 얼굴에 코는 두툼하고 면도를 말끔히 한 단정한 얼굴이다. 얼굴이 아니라 가면이라 주장하는 견해가 있지만 나에게는 분명 선사인의 얼굴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처음 그려졌던, 가장 오래된 우리의 초상화가 아닌가. 이 얼마나 시공을 초월한 만남인가.

  반구대암각화 앞에서 나는 엄숙해진다. 문자를 기준으로 선사와 역사 시대를 나누는 것은 선사인들에 대한 실례다. 문자를 가지면서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과거가 알지 못한 채 지워져버렸다. 문자를 가지지 않았지만 바위에 새긴 화려하고 찬란했을 한반도의 노래여. 진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의 문이 저기 있으니, 나는 힘차게 외친다. 열려라 문! 열려라 문!’ 2003년 11월 내 적바림에 남은 기록이다. 물이 빠지면 드러나던 진흙을 밟고 갔던 그때의 풍경이 펼쳐진다.

  1992년 8월 울산으로 주소를 옮겨왔다. K신문 사회부에서 M일보 사회부로 옮기며 울산으로 오게 됐다. 그때 처음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와 만났다. 그 당시 천전리각석은 국보 147호였고, 반구대암각화는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57호였다. 천전리각석은 출생부터 ‘국보’였고, 반구대암각화는 ‘경상남도 지정기념물’이었다. 당시 울산 역시 경상남도 소속의 울산시였다.

  울산의 지인들에게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을 물었는데 다들 잘 알지 못했다. 반구대암각화는 울산시민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천전리각석이나 반구대암각화 부근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도 문화재를 만나러 온 관람객이 아니라 물이 좋아 천렵을 온 사람들이었다.

  울산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국도 35호선 길가에 경상남도 지정 기념물 57호를 알리는 철제 안내판이 녹이 슨 고철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꼴이 너무 보기 사나워서 울산시 문화공보실에 민원을 넣었다. 그 고철 안내판이 울산의 이미지까지 사납게 하니 교체를 요청했다. 모 고위공무원 왈, 그것은 경상남도 관할이어서 울산시 책임이 아니라는 답변이었다. 그것이 1992년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울산시민과 울산공무원의 생각이었다. 요즘, 너도나도 암각화 전문가를 자처하는 세태와 비교해 보면 격세감이 크다.

  암각화의 가치를 존중하는 많은 분들의 뜻이 모아져, 반구대암각화는 1995년 6월2일 국보 285호로 지정됐다. 국보가 되었지만, 여전히 경상남도의 국보였다. 그 사이 반구대암각화나 천전리각석의 훼손이 심해졌다. 나는 반구대암각화 탁본을 모 국립박물관 직원들이 판매하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울산군수를 마치고 떠날 때 암각화 탁본을 챙겨간다는 풍문을 들었다. 천전리각석에 ‘崔海哲’(최해철)이란 이름 등이 돌로 새겨져 훼손된 현장을 ‘국보에도 낙서를’란 제목으로 기사를 송고해 M일보 1면에 보도되기도 했다. 무법천지의 세월 속에 두 국보가 ‘무정부의 장난감’처럼 방치돼 있었다.

  암각화의 랜드마크인 ‘울산암각화박물관’이 들어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심완구 시장 시절 암각화 가는 길을 확장해 포장하고 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사회단체, 시민단체, 환경단체의 반대가 빗발쳤다. 당시 암각화 가는 길은 1차선으로 승용차 2대가 교행하기 어려웠다. 곡각지점을 만들어 통행했지만 불편해 우수한 문화자원인 동시에 관광자원인 암각화 활용이 어려웠다.

  울산시는 울산방송에 요청해 세계적인 암각화의 현장을 둘러보는 보도특집을 마련했다. 울산방송 보도국장인 정상태 선배를 따라 유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알타미라동굴,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등 선사시대 문화재 곁에 전시장을 만들어놓고 활용하는 현장을 확인했다. 돌아와 나는 암각화박물관 찬성론자가 되었다. 우리가 단순히 보호와 훼손의 명목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세계는 우리와 다른 생각으로 세계문화유산을 과거에서 내일을 읽어내는 교과서로 삼고 있었다. 잘한 결정이었다. 지금의 울산암각화박물관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가.

  그리고 반구대암각화 보존문제는 전문가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애호가는 사랑으로, 시인은 시로, 화가는 그림으로, 무용가는 춤으로, 사진가는 사진으로 반구대암각화 사랑에 복무하면 된다. 어느 해인가 한국시인협회에서 국보를 소재로 징에 시를 새겨 순회전시회를 할 때 반구대암각화에 대해 나는 이렇게 썼다.

  ‘저건 바위에 새겨진 그림들이 아냐/하늘과 땅과 바다의 비밀을/사람의 내일을 노래한/저건 미래에서 온 시/바위그림을 보러온 사람은 읽지 못하는/저 시의 제작연대에 대해/수천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는/어리석은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미래의 언어로 쓰인/21세기가 읽지 못하는 저 시를/물소리는 물의 언어로 읽고 가고/바람은 바람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가는데/시인조차 시를 알지 못해 고래는 고래/호랑이는 호랑이 사람은 사람/바위 속에 새져진 시를/자꾸 그림으로만 헤아리다 온다.’

  오늘 풀지 못하는 문제는 미래의 몫이다. 정답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것이다. 오늘은 단지 관람객일 뿐이다. 그래서 내게 반구대암각화는 과거에서 미래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이다.

 

<위 글은 경상일보 2015년 5월 8일(금)자 1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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