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엘살바도르 김병섭 대사
주 엘살바도르 김병섭 대사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4.08 09: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교70주년기념 연속기획 | 나는 한마인이다①

 

 “청춘의 꿈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서든 자라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어려운 시대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그건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길 바랍니다.”
 
  주 엘살바도르 대사인 김병섭 동문(경영학과 75학번)이 후배 학우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지난 6일, 재외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틈을 내 모교를 방문한 김병섭 주 엘살바도르 대사는 네이비블루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는 국제신사의 풍모였다. 그의 외모, 옷차림에서 외교관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1984년 12월 제28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평생을 공직에서, 그것도 대부분은 국제통상 전문가와 외교관으로 보낸 김 대사는 세계 어디에 있어도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한마인’의 모습이었다.

  ◆1984년 12월 제28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1979년, 우리 대학에 처음 생긴 ‘고시원’ 학생모집 안내를 보고 시험을 쳐서 ‘고시생’의 길을 걸었다. 그해 행시 1차에 합격했지만 행정고시 합격이란 꿈을 이루는 데는 5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행시 중에서 어렵다는 재경직에 합격해 동력자원부 사무관으로 시작해 상공부, 통상산업부, 외교통상부에서 근무했다. 1994년 통상산업부 근무시절 주 제네바 상무관보를 지냈고, 2002년 외교통상부 다자통상협력과장을 지낸 김 대사의 경력에서 말해주듯 공직에서 그의 전공은 ‘FTA’(자유무역협정)다. FTA의 효시인 한-칠레 FTA에 참여해 성공적인 결실을 이뤄내는데 주역을 맡았다.

  “행시 재경직 20명의 동기 중에 지방대 출신은 저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이 S대 법대, 상대 출신이었지만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온 에너지를 다 바쳐서 일했습니다. 한국이 통상국가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집니다.”

  ◆2013년 주 엘살바도르 대사로 부임

  행시 출신 공무원에게 외교관인 ‘대사’라는 자리는 흔한 기회가 아니다. 2003년 주 칠레대사관 참사관, 2008년 주 멕시코 대사관 공사를 지내다 2011년 국립외교원 경제통상연구부 연구부장으로 일했다. 2013년 6월, 주 엘살바도르 대사관 대사로 현지에 부임했다.

  엘살바도르는 중앙아메리카의 국가다.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우리에게는 남미 축구와 커피로 유명한 국가들과 이웃하고 있다. 대사관은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에 있고, 현지 한국 교민의 수는 300여 명, 대부분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 대사는 대사관이 없는 인국 영어권인 벨리즈의 외교 업무까지 책임지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세주’란 뜻입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영토를 가진 국가이지만 날씨는 온순하고, 국민들의 성품이 원만해 심각한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면 미래에는 큰 발전이 기대되는 국가입니다. 공직에서 마지막 임지가 되겠지만 임기가 끝나는 내년 6월까지 제 임무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사랑하는 외교관

  칠레에 근무한 적이 있는 김 대사에게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 대해 물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국민시인이다. 김 대사는 외국 이름을 ‘파블로’로 쓸 정도로 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대단했다.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은 후 평생 그의 독자가 됐다. 김 대사는 칠레에 파블로 네루다가 거처한 3곳의 집이 있는데, 모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주었다. 월영캠퍼스 시절, 김 대사는 시인을 꿈꾸었을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파블로 네루다는 말했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고. 김 대사도 그랬다.

  ◆개교 70주년, 한마의 저력에 박수를

  “내년이 모교의 개교 70주년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한마의 저력 또한 느껴졌습니다. 저도 내년이면 공직에서 은퇴를 합니다. 모교는 저에게 ‘전액장학금’을 지원하며 꿈을 이루도록 도와줬습니다. 기회가 되면 이제는 제가 모교의 발전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인터뷰 전에 네이버 인물검색으로 찾아본 김 대사의 젊은 시절 모습은 눈빛이 형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 대사는 편안한 분이었다. 경륜은 그런 것이다. 자신을 빛내는 훈장이 아니라 자신을 부드럽게 만드는 인생의 무늬 같은 것이다. 임지로 돌아가는 김 대사의 안녕을 빈다.


<위 글은 경남대학보 2015년 4월 8일(수)자 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