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국어과 교수 된 김경식 前총무처장
중국 한국어과 교수 된 김경식 前총무처장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4.0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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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직원 33년 노하우 살려 중국서 한글 가르치죠

 

  “저가 집 당산이고 아빠님은 공안 하십니다. 한국 드라마 좋아서 한국어 잘하고 싶어요” -안군봉(21)씨.

  첫 수업은 자기소개로 시작된다. 자기의 고향은 어디며, 이름은 무엇인지, 가족관계와 전공(한국어)을 선택하게 된 동기 등에 관해 발표한다. 말은 어눌하고 더듬거리지만 자기소개를 하는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함 그 자체다.

  석가장(石家庄)의 아침은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로 깨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하북외대 (河北外國語學原·Hebei Foreign Studies University)는 베이징과 톈진을 품고 있는 하북성 성도(인구 1100만)에 있는 석가장에 있다.

  오전 7시면 1만1000명에 이르는 대학생들이 운동장에 학과별로 모여 큰소리로 자신들의 전공(외국어)관련 서적을 꺼내 낭독한다, 이 모든 것이 학생들의 발성, 발음, 읽기 연습을 위해서이다. 오전 8시 30분 첫 수업을 시작해 8교시를 마치면 학생들은 오후 7시부터 다시 자율학습에 들어가는데, 하루 11시간 이상을 교실에서 보내는 중국 대학생들의 일과는 한국 대학생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행군이다.

  이 중에서 650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한국어를 전공한다. ‘2+2 프로그램’으로 3·4학년을 한국에서 공부할 학생들을 모아 국제반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다. 국제반에서는 수업은 물론 생활과 농담마저도 한국의 대학과 똑같이 하도록 교육시킨다.

  33년 대학생활의 노하우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학생들의 편입학은 물론 출입국과 기숙사, 학점관리까지 도맡아 지도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중국에서 2년간 한국어를 전공한 후 경남대학교 국어국문과 3학년으로 편입해 학문적 가치로서의 한국어를 전공한다. 한마디로 한국어 전문가(한국어 교육전문가)가 되는 셈이다. 이런 학생들과 하루 종일 부대끼다 보면 강한 동지애마저 생긴다.

 

  이쯤에서 내 이력을 소개할까 한다. 지난 1981년 모교인 경남대학교에 취업한 나(57·김경식)는 지난해(2014년) 퇴직할 때까지 33년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나의 직장생활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직원으로 취업한 해부터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격동과 혼돈의 시기였다. 대학은 반정부 운동의 해방구로 공권력과 대립했고, 이로 인해 대학캠퍼스는 하루도 최루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학생처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담당하면서 그들을 끌어안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대학 본관이 점거당하는 날이면 몇 개월씩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아내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올 때 아이들을 잠시 안아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10년간 이념과의 전쟁이 끝날 무렵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교육개혁과 대학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기획처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변화와 개혁의 전방에서 또다시 보수적 성향의 교수·직원들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교육기관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도 어려웠지만 구성원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교직원들의 공공의 적이 된 채 또다시 10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다음으로 옮긴 자리가 인사처였다. 21세기로 들어서자마자 지방대학은 신입생 확보에 대학의 사활을 걸어야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아버지와의 따뜻한 추억 한 번 갖지 못한 채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해 결혼까지 했다.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할 것으로 생각해 선택한 직장이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전쟁터에 뛰어든 결과가 됐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지난 30년간의 직장 생활을 후회한 적은 없다. 편한 자리에서 복지부동과 보신주의로 살았다면 지금의 꿈같은 인생 2막은 없을 것이다.

  명예퇴직을 3년여 앞둔 어느 날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고등교육연수원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기획처에 근무할 당시 ‘기획 능력 향상’ 등을 주제로 20여 차례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됐다. 강의 주제는 ‘퇴직 준비와 제2의 인생 설계’였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인생 2막에 대한 깨우침이 있어 강의를 마치자마자 바로 서울대학교 온라인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에 등록을 했다. 한 학기 동안 잠을 줄여가며 강의를 듣고 과제를 제출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국어교원자격증시험은 과정을 수료한 후 재수를 해서 겨우 시험에 합격했다.

  이 무렵 경남대 청년작가 아카데미를 알게 됐고 2년 과정의 시(詩) 공부를 시작했다. 2012년 겨울. 고성 안국사에서 열린 겨울캠프에서 독수리를 주제로 강의를 맡았는데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 독수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덕분에 ‘독수리를 위한 변주’라는 연작시가 제31회 열린 시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는 기쁨도 누렸다.

  퇴직 후 국제교육원에서 ‘2+2 과정’으로 유학 온 중국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집 앞 텃밭도 일구고 시도 쓰는 정말 평화로운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문득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무렵 하북외대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다.

  서쪽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와 집에서 돌보고 있는 손자, 그리고 새로 지은 집 관리가 발목을 잡았다. 원래 완벽한 기회란 없지만 아내의 결단과 용기가 나에게 큰 힘이 됐다.

  “30년 전 일본으로 유학 가려던 당신은 가족 때문에 꿈을 접었지만 이제는 당신의 길을 가시라고, 당신은 돌아보지 말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라”는 아내의 말에 힘을 얻었다.

  내가 하는 일은 대륙의 심장에 한국의 혼을 심는 일이라고 자부한다. 2020년이면 G1이 될 중국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전파하면서 우호적인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다.

  앞으로 10년간 나는 중국,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한국의 혼을 심을 것이다. 확실한 명분과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준비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 용기 있게 일어서는 자만이 인생 2막의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위 글은 경남신문 2015년 4월 6일 (월)자 09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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