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일 교수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 펴내
박태일 교수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 펴내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2.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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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이원수의 부왜문학, 명쾌하게 규명

▲ 박태일 경남대 교수는 최근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을 펴냈다.
  "유치환과 이원수야말로 나라 잃은시대의 민족적 쟁투와 관계없이 한 몸 이득을 꾀하다 광복 뒤 변신에 성공한 대표 인물로 본다. 이들 문학의 실체와 명성의 뿌리를 제대로 파들어서는 일이야말로 근대문학사의 뼈대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믿음이 한결같다."

  부산․경남 지역문학을 연구해온 박태일 경남대 교수(국문학)가 저서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附倭)문학>(소명출판 간)을 내면서 이같이 밝혔다. 일부에서는 유치환에 대해 '친일(부왜)'이 아니라고 하지만 박 교수는 그의 부왜 행적은 뚜렷하다고 보았다.
 
  통영 출신인 유치환(청마·1908~1967)은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1957년)을 지냈고 시 '깃발' 등을 남겼다. 양산에서 태어나 창원에서 한때 살았던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는 한국아동문학협회 회장을 지냈고 동시 '고향의 봄' 등을 남겼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원수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지만 유치환은 포함하지 않고 연구·검토가 더 필요하다며 보류했다. 유치환 기념사업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인 2007년 통영에서 그의 부왜문학 활동과 관련한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 유치환 시인.
유치환의 시 '수'에 관한 해석

  유치환은 통영에 살다 중국으로 갔다. 그는 친일 '만주국' 국가조직인 '하얼빈협화회'에서 일했다. 그가 남긴 문학작품 가운데 1942년 3월 <국민문학>에 발표됐던 시 "수(首)"를 놓고 '부왜다, 아니다' 논란이 있다.

  박태일 교수는 "유치환의 부왜시 '수'에 나오는 효수 당한 두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 동북항왜연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조상지(1908~1942) 장군이라는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책에서 소개했다.

  중국 연변에서도 유치환 기념사업을 두고 논란이다. 이런 가운데 2013년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는 시 '수'에 나오는 효수 당한 머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규명했다.

  박 교수는 책에서 "김 교수는 1940년 앞뒤 시기 일반 도둑은 효수해 매달아 선전전에 이용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점에 착목했다"며 "'수'에 나오는 효수 당한 머리의 주인공은 당내 동북항왜연군의 고위급이나 지휘관일 거라 보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치환이 '수'를 발표한 때가 1943년 3월임을 미루어 볼 때, 첩자에 의해 순사한 조상지 장군이 당사자라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장군은 북만주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녔던 주하(유치환이 살았던 연수현과 가까운 곳) 유격대의 창설자이며 한때 동북항왜연군 총사령을 맡았던 이다"고 덧붙였다.

  또 박 교수는 "1942년 2월 12일, 삼강성(흑룡강성) 오동하분주소를 습격하려다 첩자가 쏜 총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체포된 뒤 8시간 만에 순사했다, 그러자 그 머리를 왜로 군경이 잘라냈다, 가목사(佳木斯)에 있는 삼강성 경무청에서는 확실히 장군인지 확인하려고 조상지 장군을 잘 알면서 북만항왜연구의 지휘관으로 있다 변절한 이화당에게 장군이 순사한 곳으로 달려가서 수급(首級)을 검험케 한 다음에야 가목사에 있는 삼강성 경무청으로 실어갔다 한다"고 소개했다.

  또 박 교수는 "김 교수는 유치환의 시 '수'에 나오는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내걸려 있도다'라는 시줄에서 이른바 '가성'은 가목사의 약칭일 수도 있다고 본다"며 "그리고 '머리 두 개 내걸려 있도다'라는 시줄은 유치환이 가목사의 현장에 가 있었을 개연성을 일깨워 준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유치환이 협화회 일을 보고 있었으니 그런 짓거리에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라며 "장군의 머리를 효수한 짓거리는 유치환이 문제의 시 '수'를 써서 발표한 시기와 완전히 맞아떨어진다, 공간적으로 볼 때 유치환이 살고 있었던 빈강성 연수현과 삼강성 탕원현은 그리 멀지 않다, 장군의 죽음은 그 무렵 만주국 사회뿐만 아니라 유치환에게도 시를 써서 남길 만큼 커다란 충격을 준 일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박 교수는 시 '수'의 부왜문학 근거를 몇 가지 더 들고 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는 유치환이 직접 조상지 장군의 수급을 현장에서 보았을 정황을 뒷받침하는 묘사인 것"이라고 밝혔다.

  박태일 교수는 유치환과 관련한 논란거리 3가지에 대해 명쾌한 해명을 해놓았다. '통영 출향 이유'에 대해 그는 "지식인 탄압으로 말미암은 지사형 도주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를 저질러 도망치듯 떠났다는 개인형 도주설이다"고, '만주 체류 실상'에 대해 "만주국의 개척․협화 이념에 복무했던 반민․반민족적인 삶"이라고, '부왜작품 풀이'에 대해 "산문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와 시 '수'를 비롯한 5편이 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유치환의 허상을 날카롭게 실증해 놓았다.

▲ 이원수 아동문학가.
" 이원수는 작품 바꿔치기, 이념 세탁"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어떤가. 박태일 교수는 "이원수는 광복기 새 문학 환경 아래서 '서민 아동의 세계'를 지향한 현실주의 어린이 문학인으로 새롭게 자신의 명성을 생산하고 강화할 수 있는 전략을 펼쳤다"며 "거기에 도움이 될 작품만 가려 뽑아 재발표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품 외적 문맥은 무시한 채 작품을 바꿔치기 또는 이념 세탁을 꾀한 셈"이라며 "문제는 이러한 재발표 사정은 깡그리 묻힌 채 이제까지 현실주의자, 민족주의자라는 명성이 작용해 왔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나라 잃은 시대 후기 동시 가운데서 이원수 생전에 끝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 12편은 모두 유희 동시나 미학 동시다"며 "재발표 전략으로 가려 뽑힌 작품과 달리 이 미발굴 동시는 거꾸로 서민적, 민족적 현실주의자라는 이원수 자신의 개성이나 명성을 키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쪽에 놓인다"고 책에서 기술해 놓았다.

  이어 "게다가 그 한가운데는 부왜 작품까지 버티고 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원수가 끝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했을 이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자장이야말로 공교롭게도 이원수 문학에서 철저하게 잊혀 있었다"며 "오랜 세월 이 작품들에 대한 은닉이나 기억 은폐가 자연스러울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라 덧붙였다.

  이원수는 1942년 '낙하산-방공비행대회에서'와 1942년 조선금융연합조직회의 기관지인 <반도의 빛>에 학도병 지원을 찬양하는 '지원병을 보내며' 등 친일시를 발표했다.

  박태일 교수는 <경남부산 지역문학 연구>(2004년)에 이어 지난해 말에는 <마산 근대문학의 탄생>을 펴냈다.

<위 글은 오마이뉴스 2015년 2월 6일(금) 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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