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호 석좌교수, 고향 수원서 3년째 창작교실
최동호 석좌교수, 고향 수원서 3년째 창작교실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5.02.0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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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명시 남긴 미당·두보 선생도 고치고 또 고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

  최동호(67·고려대 명예교수·경남대 석좌교수) 시인은 미당과 두보를 시작(詩作) 태도의 한 모범으로 거론했다. 그가 고려대 국문과 교수에서 은퇴하기 1년 전인 2012년부터 고향 수원에서 이어 온 ‘남창동 최동호 시 창작교실’ 수료식에서였다. 지난주 목요일, 1월29일은 강좌가 5기째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그는 미당의 시작노트를 인용해 서정주가 시를 다시 고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수강생들을 향해 곡진하게 당부하고 설명했다. 1968년 ‘현대문학’에 실린 미당의 시 ‘내가 돌이 되면’의 초고와 완성본은 달랐다.

  “내가/ 돌을/ 만들면// 돌은/ 연꽃을/ 만들고// 연꽃은/ 호수를 만들고// 하눌 밑에 있는 것은/ 이 호수뿐이니// 여기에서/ 알라스카까지// 애인아/ 너는 혼자/ 왼켠으로 돌아가고/ 알라스카에서/ 여기까지// 나는 혼자/ 바른켠으로 돌아오고”로 이어지는 초고를 미당은 완성본에서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로 바꾸었다고 제시했다. ‘만들면’을 ‘되고’라는 시어로 고치고 나니, 잡다한 산문이 사라지면서 아연 견고하고 확장된 상상력이 펼쳐졌다는 이야기다.

  최 시인이 20세기 후반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미당조차 고치고 또 고치는 데 진력했다는 증거를 대면서 하물며 시를 배우는 사람들이야 지적을 당하고 고치는 일을 부끄러워하거나 멈칫거려서는 안 될 일이라는 말을 하기 위한 수료식 특강 자리였다.

  “두보는 ‘내 시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단한 노력형이죠. 천재는 빨리 죽어요. 이 나이까지 사는 사람들은 모두 요절에 실패한 사람들 아녜요?”

  고치고 또 고쳐서 좋은 시가 된다면 그는 분명 좋은 시인이라는 언설이다. 고쳐서 오히려 나빠진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선생을 잘못 만난 탓일지 모른다. 최동호는 타고난 재능을 탓하는 건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두보에 대한 언급은 “이백 같은 이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일필휘지했다는데 시는 아무래도 타고난 재능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 대답은 뒤풀이자리에서 얻었다. 수료식이 진행된 곳은 수원 화서문 인근 선경도서관이었고, 인근 식당이 뒤풀이 장소였다. 시낭송과 노래와 덕담이 이어졌다. 이날 남창동 창작교실에서는 애초 등록은 70여명이 했지만 최종 22명이 수료장을 받았다. 모두 12회 강의 중 3번 이상 결석하면 통과할 수 없는 엄격한 규율 때문이다. 여러 번 창작교실에 등록했다는 최고령 수강생 이병희(85)씨는 이날 뒤풀이에서 자신의 창작시에 곡을 붙여 즉석에서 노래로 불렀다.

  그네는 “좋아졌다고 누가 그리 말했던가요/ 글 안 쓰면 행복이 무엇인지를/ 몰랐으니 글을 써야죠”라면서 “돈 많다고 행복했나요/ 글 쓰러 갑니다 행복을 찾아서”라고 흥에 겨워 불렀다. 글을 쓰는 일이 행복이라니, 그것도 85세 노파에서부터 20대 여성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주민들이 즐거워하는 글쓰기라니.

  “아버지는 타지의/ 직장으로/ 멀리 전근 가시고// 어머니도 없는 빈 집에/ 늙은 박쥐/ 날아드는 소리 천장에서 들리는 밤// 옛 이야기 팔달산 영 넘어 가면/ 졸음에/ 사윈 눈꺼풀 할머니 속적삼에 풀려// 전설이 굽이도는/ 외진 산모롱이/ 옷고름 길에 풀잎처럼 잠드는 아이들”(최동호, ‘팔달산 아이들’)

  최 시인은 수원에서 태어나 남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중학교를 1학년까지 다니다 목포 유달중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가 목포 세관장으로 봉직할 때 할머니 밑에 있다가 어머니 품이 그리워 떠났다고 했다. 53년이 지난 2013년 그는 수원중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정조대왕의 그늘이 깊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 인근 남창동은 증개축도 마음대로 안 돼 쓸쓸한 거리로 황폐해져가던 터에, 주민들과 최동호 시인의 의기투합으로 새로운 인문거리로 탄생한 보답이었다. 공식 뒤풀이 후 남창동 카페로 자리를 옮겨 ‘남창동 최동호 시 창작교실’의 자취를 더듬었다.

  최동호 시인은 수원 명문가를 외가로, 집현전 학자를 지낸 목포 친가를 배경으로 인텔리 집안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5·16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힘겹게 현실을 지탱했고 어머니가 8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아버지를 지켜본 형제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형과 그래도 명예와 가치를 더 붙드는 동생 같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고 했다. 최 시인은 그때 이래 지금까지 돈보다 가치를 좇았고 세속적 평가까지 아우른 결실도 좋았다.

  혹독한 시간강사 시절을 거쳐 경남대, 경희대, 고려대 교수로 교직을 이어갔는데 고려대 국문과에서 학생들을 ‘등단과 등산’으로 엄하게 수련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신춘문예에 그해 등단한 제자들은 산 밑에 남겨놓고 떨어진 제자들은 자신이 이끌고 등산을 시켰다. 그의 문하에서 등단한 제자들만 100여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에너지가 실감난다. 그가 이제는 고향 거리의 사람들을 시로 움직이는 중이다.

  최동호 시인 옆자리에는 아내 김구슬(62·협성대 영문과 교수) 시인이 앉았다. 그네는 국내에 한시를 제대로 각인시킨 학자 시인으로 호가 높은 김달진(1907∼1989)의 딸이다. 최동호 시인이 ‘한국의 한시’(민음사·전3권)를 비롯해 김달진 전집까지 출간하면서 공들이지 않았다면 외로운 노시인이 지금처럼 세간에 알려졌을지는 미지수다.

  꽃다비, 어질이, 구슬 같은 한글 이름을 딸에게 지어준 김달진은 최동호의 장인이다. 소개팅으로 만났다가 헤어질 뻔했는데 최동호 첫 시집 ‘황사바람’을 본 김달진이 딸에게 “그 사람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거들어 30년 넘게 해로하는 부부가 됐다. 불경 번역에 매진하다 말년에는 시까지 접은 김달진은 차갑고 조용한 방에서 스님처럼 자신을 맞았다고 최 시인은 장인과의 첫 만남을 술회했다. 김구슬 교수도 2009년 시인으로 데뷔해 ‘삶과 꿈’에서 펴내는 ‘올해의 좋은 시’에 뽑히기까지 했다. 최동호 시인은 옆자리에서 “(그 소식을 들은) 어제 저녁에는 내가 좀 위협을 느꼈다”고 웃었다.

  올 5월에는 오래 준비해 온 정지용 시 발굴, 비평, 사전까지 포함한 전집을 낸다고 한다. 교수 시절부터도 쉼 없이 일을 놓지 않다가 퇴임 후에는 다시 고향에서 일을 ‘벌이는’ 그의 에너지가 경이로운 차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읽고 외우고 고쳐 쓴 미당의 기록을 접하면서 끝없이 포기하지 않는 그분들을 새삼 존경한다”고 말했다. 카페를 나섰을 때 수원 화성 서쪽 문은 여전히 환한 빛 아래 있었다. 시와 처음 입 맞춘 기억을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첫사랑 시의 입맞춤 남몰래// 화령전 붉은 기둥에 새겨놓고// 나비 날아간 그 꽃밭 사잇길// 누가 볼세라 잠  못 든 어린 날”(‘화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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