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4.09.3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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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국제'와 황순원의 콩소설

  한가위 귀성 인파로 번잡을 더해 가던 지난 9월 5일이었다. 한낮 늦은 시각, 언론사 기사 하나가 급히 떠올랐다. '소설가 고 황순원 씨 부인 양정길 여사 별세'가 그것이다. 향년 아흔아홉 살. 이승에서 수를 누린 셈이라 할까. 소설가 황순원의 아내이자 시인 황동규의 어머니시니, 시대를 대표하는 두 문인을 한 몸에 품고 길러낸 분이다. 이해타산, 재물과는 거리를 둔 두 사람 아닌가. 아내로서나 어머니로서나 여사의 삶은 어렵고 고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오래도록 황동규 시인과 한 아파트 위아래서 오순도순 머물렀다. 아들 내외의 효성이 늘그막까지 위안이 되었으리라.

  작가 황순원은 1950년 전쟁기 세 해 동안 부산·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유명 소설가였지만 늘 곤궁했다. 이를 눈치 챈 황동규 시인이 어린 중학생 몸으로 신문팔이에 나섰다.

  대구서 있었던 일이다. 황순원은 갈 곳이 없어 주로 다방에서 해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 매일같이 신문 장수들이 거리로 나설 때쯤이면 몸을 감추었다. 아버지로서 몰래 신문팔이를 하고 있는 아들과 차마 맞닥뜨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나마 계속하는 것을 더 볼 수 없었다. 황동규 시인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당시 문단 편모의 하나로 잡지에 소개된 애틋한 얘기다. 황순원 일가가 겪었을 피란의 어려움이 뚝뚝 묻어난다.

  황 시인은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아주 열심히 사셨다", "대를 이어 문학하는" 둘을 "보살피고 키우느라 힘드셨다"고 말했다 한다. 힘드셨다는 말마디에는 표현하지 못한 굽이굽이 간난이 스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기 '주간국제'에 황순원은 콩소설(콩트)을 한 편 실었다. '주간국제' 6호에 올린 '무서운 웃음'이 그것이다. 아직까지 미발굴로 남아 있는 작품이다. 국제신문사는 창간 이후 '주간국제'를 두 차례 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117호에 이른 대중오락지 '주간국제'가 하나다. 1970년대 후반 경직된 국가 사회 분위기 아래서 흥미·오락을 통해 연성의 대중 취향 영역을 넓혀 나갔던 매체다. 많이 팔렸을 땐 36만 부에 이르렀으니 호응이 컸다.

  다른 하나는 부산이 임시수도를 맡고 있었던 전쟁기 중 냈다. 1952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8호까지 이어진 시사주간지 '주간국제'가 그것이다. 부산을 텃밭으로 삼고 있었던 국제신문이 전국 최대 부수를 자랑할 무렵이다. 인기 작가 황순원은 '주간국제'에도 빠지지 않고 작품을 올렸던 셈이다. '무서운 웃음'은 초등학교 시절 마을의 민턱영감이라 불리는 이와 얽힌 일을 다룬 작품이다. 민턱영감은 수염뿐 아니라 터럭도 나지 않았다는 사람이다. 매사냥을 즐겼다. 여자를 몇이나 갈았으나 자식을 보지는 못했다. 소년인 나는 영감네 집을 지나치다 그가 안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호기심에 끌려 다가가니 홰에 앉아 졸고 있는 매를 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살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민턱영감은 그 광경을 조심스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에게도 가만히 물러나 있으라 손짓을 했다. 드디어 고양이와 매 사이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몇 차례 뒹구는가 싶더니 싸움은 이내 끝났다. 달려드는 고양이의 눈깔을 매가 잽싸게 파버린 것이다. 피로 붉게 물든 고양이가 달아나는 것을 본 뒤에야 민턱영감은 수염 없는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생각했다. 민턱영감에게 자식이 없는 것은 무서운 웃음을 웃는 탓이라고. 어린 시절에 자주 겪었음 직한 무서움이라는 직접 경험을 담아낸 작품이다. 민턱영감과 그가 기르던 매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잘 옹글었다. 황순원은 원고를 '주간국제'에 넘기기 위해 남포동 사옥에 손수 들렀을까? 원고료는 얼마나 받았던 것인가?

  나는 지난해 작가 황순원이 누워 있는 경기도 양평군 황순원문학촌을 처음으로 찾았다. 잠시 학계 시빗거리로 불거진 '소나기'의 원전을 확정하고 변개 과정을 밝히기 위한 심포지엄 발표 걸음이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 줄기 한강으로 어울러 내리는 두물머리, 양평 전철역에 내린 때는 비 듣는 구월 아침이었다. 택시로 15분 남짓이었던가. 그곳에 황순원문학촌이 열려 있었다. 광복 이후 내려온 북녘 작가가 한둘 아니건만 오늘날 유일하게 세워진 월남 작가를 위한 현양 공간이다. '소나기'의 주인공 소녀가 양평읍으로 이사를 갈 것이라 했던 한마디를 터무니로 삼아 문학촌을 세우고 작가의 묘소까지 마련한 혜안이 돋보이는 곳이다.

  황순원은 2000년에 영면했다. 양정길 여사를 곁에 모셨다고 한다. 열네 해 만에 다시 만난 내외다. 초가을 볕살을 즐기면서 1950년대 피란길 부산·대구 시절 이야기도 길어지리라. 그러다 거슬러 올라가 '무서운 웃음'의 배경인 평안도 대동군 고향 마을에도 오가실 게다. 이승의 볕살 넉넉히 받으며 편안한 저승살이가 되길 빌어 드린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4년 9월 18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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