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에 만난 사람] 정일근 교수
[이 달에 만난 사람]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4.07.02 09: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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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대사'로 불러주세요

 

  정일근 시인(54세)에게 고래는 그리움이다. 1977년을 마지막으로 울산 앞바다에서 모습을 감춘 귀신고래가 오래 전 떠나보낸 연인처럼 애틋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브라이드 고래의 지느러미뼈를 보면, 사람 손 같은 그 뼈를 붙잡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바다의 노래, 생명의 시(詩)

  정 시인은 한때 사회부 기자였다. 1992년 문화일보 울산 주재 기자로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기사를 쓰다가 고래에 관심을 갖게 됐다. 300여 점의 암각화 문양 중 고래는 무려 58점. 그중에는 새끼를 등에 업은 어미 귀신고래도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고래가 인간과 함께했음을 보여주는 암각화 앞에서 그는 문득 죄스러웠다. 그가 안타까운 건 고래를 식재료로만 보는 문화다. 고래 고기에 대한 수요는 있지만 공급이 부족하니 암암리에 불법 포경도 일어난다. 

  그래서 정 시인은 불법 포경 반대 1인 시위, 삭발 시위, 해상 시위까지 안 해본 게 없다. 5년간 수요일마다 고래 목측선을 타고 목측조사도 참여했다. 고래를 만나면 ‘한 마리’가 아닌 ‘한 분’이 나타났다 외쳤다. 5천 마리는 족히 됨직한 돌고래의 군무를 본 날도 있다.

  “바다에서 만난 돌고래 떼는 살아 움직이는 피아노 악보예요. 보통 2~3미터는 가뿐히 뛰어오르는데 어찌 이런 황홀경이 있나 싶죠. 고래를 본 날은 정말 기분이 좋아요. 엔도르핀이 막 돌죠.”

  건강 악화로 1998년 기자 일을 그만둔 정 시인은 울산시 울주군 은현리에 마련한 집필실에서 바다가 불러주는 시를 받아 적었다.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후 짬짬이 쓰던 시가 봇물처럼 흘러나왔다. 고래를 지킬 시인의 무기는 결국 펜이었다. 내친김에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고래 시집도 냈다. 지금껏 모임을 거쳐 간 시인은 100여 명에 달한다.

  “2005년 울산에서 제57회 국제포경위원회(IWC) 총회가 열린다기에 고은, 김남조, 신경림 등 시인 50분에게 고래 시를 청탁했어요. 한국에서 고래를 보호한다는 걸 세계에 보여주려고요. 김성곤 현(現) 한국문학번역원장과 영국 시인 알렉 고든이 번역을 맡아, 그해 5월 [고래의 노래]라는 한영시집을 냈지요. 시인 모임도 그 무렵 만든 겁니다.”

  뿐만 아니다. 고래 관련 작품을 소개하는 푸른고래 출판사에서 부정기 간행물 [고래와 문학]을 비롯한 단행본도 펴낸다. 올해 10월에는 정 시인의 고래 시에 직접 찍은 고래 사진을 함께 실은 시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시(詩) 노래 모임 ‘나팔꽃’에서 활동했던 정 시인은, 노래와 시가 함께할 때 큰 파급력을 얻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고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만들자 나섰다. 고래 가수 남미경을 비롯한 ‘울산사랑 시 노래회’ 회원들이 함께했다. ‘나팔꽃’ 모임에서 함께 활동한 시인 백창우, 김현성, 안도현 등도 힘을 보탰다.

그물을 걷고, 고래를 기다린다

  정 시인이 사랑하는 귀신고래 조형물을 보러 장생포 고래생태체험관으로 향한다. 거대한 몸에 따개비가 딱지처럼 우둘투둘 붙어 있다. ‘바다의 경작자’로 불리는 귀신고래의 특징이다.

  “귀신고래는 바다 밑 땅을 파서 먹이를 채취해요. 그러다보니 다양한 갑각류가 몸에 달라붙지요. 땅을 파야 하니 고래 중에서 해안에 가장 가깝게 다가오고, 그러다가 그물에 걸리는 겁니다.”

  그는 고래를 위협하는 그물을 걷고, 고래가 돌아오는 울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지자체 관계자와 만나서도 “산 고래 한 마리가 죽은 고래 천 마리보다 더 큰 부가가치가 있다”고 설득했다. 울산시에서도 그의 노력에 공감해 2009년 4월 25일을 고래의 날로 선포하고, 울산 해역 155㎞를 ‘고래바다’로 선언했다.

  정 시인이 쓴 ‘고래바다 울산 선언문’을 육필로 새긴 기념비도 장생포에 세웠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된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廻遊海面)’, 울산 바다를 가리키던 ‘경해(鯨海)’라는 이름의 참뜻을 되찾은 셈이다.

  고래 보호 활동을 하면서 ‘고래 시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정 시인은 자신을 ‘고래 대사’로 여긴다. 그 말에는 고래를 대변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2010년부터 경남대학교 교수로, 청년작가 아카데미의 시 창작 강의로 바빠도 고래 보호 활동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올해 7월 3~6일 울산 장생포와 태화강 일대에서 열릴 제20회 울산고래축제에서도 중요한 행사가 예정됐다. 7월 4~6일 사흘간 열리는 고래문학제다. 전국 문인을 초대해 고래바다를 돌아보고 ‘고래 문학의 밤’ 행사와 세미나도 연다. 고래 동시·동요 인형극 등 문화 행사도 마련됐다. 고래 시인이 맹활약할 7월이 기다려진다.

<위 글은 월간 샘터 2014년 7월호 '이 달의 사람'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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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진석 2014-07-09 09:31:56
정일근 교수님이 우리학교에 계셔서
모교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