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칼럼]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칼럼]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4.05.3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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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기 부산의 첫 문예지 '문예조선'

  나라 잃은 시대 35년 동안 부산은 섬나라로 드나드는 가장 큰 항구였다. 게다가 왜풍 짙긴 했으나 서울·평양과 나란히 거듭 몸집을 불려 나온 곳이다. 을유광복은 그러한 부산 지역사회를 다시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나라 바깥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와 도회로 밀려든 시골 사람으로 북적였다. 양질에서 급격한 도시화를 겪게 된 것이다. 나라 제1항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틀을 모든 데서 새로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광복이 되자마자 나왔던 잡지들도 그러한 지역 형성의 새 기운을 함께 했다. 그들 가운데 지역문학의 움직임을 담아낸 광복기 부산의 첫 문예지는 어떤 것일까?

  월간 '문예조선'이 그 답이다. 1945년 12월 25일 인쇄에 넣어 1946년 1월 1일에 창간호가 나왔다. 광복 이듬해 새해 첫날 첫걸음을 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창간사에서 '문예조선'은 "노동자 농민 근로 대중의 피와 땀으로" 단결해 새 국가 건설에 앞장서고, "문화건설에 일 초석"이 되겠다는 다짐을 확실히 했다. 펴내는 이들의 의욕은 문학을 넘어서고 있었던 셈이다. 발행소는 문예조선사다. 중앙동에 터를 두었다. 편집·발행은 박능출이 맡았다. 주필은 박명실이었다. 편집 실무에는 이광우가 이름을 올렸다. 34쪽의 얇은 문예지다. 그럼에도 속살에는 광복기 지역 동향을 적지 않게 갈무리하고 있다.

  이곳저곳 네 군데에 실린 신탁통치 반대 표어부터 이채롭다. "동포여 문예조선은 혈규한다 죽옴으로서 신탁통치라는 괴물과 투쟁하자" "신탁통치라는 괴물과 민족의 생명을 바처 투쟁하자"와 같은 것이다. 당대 열띤 여론을 되비춘 바다. 겉표지는 서상수라는 이의 '무희'로 채웠다. 안표지에는 광고를 둘 실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민족의 강건에 있다"는 구호를 앞세운 '체술원(體術院)'의 것이 하나다. 원장은 김익상, 사범은 유도 5단 장지관이 맡았다. 고학생연맹경남지부(위원장 장희옥)의 광고가 다른 하나다. 고학생 연맹이 만들어졌으니 찾아오라 했다. 지역의 다채로운 동향을 점치게 하는 광고다.

  본문에서는 문학 바깥 기사의 비중이 높다. 기미만세의거의 경과를 밝힌 '백일하에 폭로된 만세사건의 진상'도 그 하나다. 광복을 맞아 지난날 폭발적인 민족의 기운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고자 한 글이다.

  사읍(思泣)이라는 이가 쓴 '건국일지'도 흥미롭다. 1944년부터 글쓴이를 포함해 동지 20명 남짓이 당을 만들어 비밀리에 활동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목표는 한국 광복과 연합국의 승리 기원이었다. 게다가 글쓴이는 이미 8월 14일 동래 일광에서 일본 무조건 항복의 공기를 대략 알아채 집으로 돌아왔다. 당원들과 잠시 의견을 나눈 뒤, 저녁에 다시 만나 조직 활동을 의논하는 모습이 선명하다. 그들이 광복 뒤 자연스레 '문예조선' 관련 인사로 옮아간 것으로 보인다.

  문예면에서는 이광우가 콩소설(콩트) '귀환선'을 내놓았다. 박능출은 연재소설 '부두'를 시작했다. 왜인이 쫓겨가면서 공장을 다른 자본주에게 넘기려 했다. 그것을 보고 직원들이 공장관리위원회를 만들어 공장을 살리려 애썼다. 그럼에도 일이 난망에 빠져드는 모습을 그렸다. 짧게나마 광복 직후 부산의 산업계 동향을 엿보게 하는 작품인 셈이다. 시에는 춘수·오추월·김명득·차은호와 같은 시인이 작품을 실었다. 모두 뒷날에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이다. 그 밖에 읽을거리로 편집부가 기획한 부산의 '홍등가 편모'가 이채롭다. '환락경은 범죄의 소굴'이라는 부제로 속살을 미리 암시하고자 했다.

  송장준이 쓴 '연극계 전망'도 눈길을 끈다. 광복 직후 부산 유일의 극장이었던 부산극장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어 공연할 데가 없다는 말로 글머리를 열었다. 배우라고는 "연극 부르커들"이 내세운 "불량청년, 극장 기생충, 카페 여급들"이다. 그들이 "민족의 예술성"을 더럽히고 동포의 주머니를 빨며, 어린애 "작난거리보다 못한 연극"을 한다는 힐난을 마구 퍼부었다. '대영악극단'과 '백락악극단'이라는 해당 단체 이름까지 밝혔다. 그런 가운데 유창건이 짓고 연출한 '삼천리강산에 봄이 왓다'를 공연한 '명랑극단'은 양심적이라 추어 올렸다.

  문학 바깥까지 두루 관심을 보였던 문예지 '문예조선'은 창간호 뒤 두 차례 더 나온 것으로 보인다. 2월 2호에 이어 3월에 낸 3·4월 합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는 이름을 '문예'로 바꾸었다. 두어 달 사이에 이름을 바꾸고 월간을 지키지 못할 만큼 지역 출판계 지형이 복잡했던 셈이다.

  문예조선사는 단행본 출판까지 꾀했다. 그럼에도 다른 본보기는 볼 수 없다. 광복 초기 전단을 비롯한 묵직한 인쇄물을 적지 않게 냈을 거라 짐작할 따름이다. '문예조선'은 열망과 변혁의 광복기, 부산 지역 동향을 담아낸 중요 사료 가운데 하나다. '문예조선'을 펴낸이들의 뜻과 바람을 잊지 말 일이다.

<위 글은 국제신문 2014년 5월 29일(목)자 31면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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