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교수, 경상일보에 '정일근 칼럼' 게재
정일근 교수, 경상일보에 '정일근 칼럼' 게재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11.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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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은 달, 11월

  가을-겨울 사이, 작은 봄이 머문다 해서
  선인들이 ‘小春’이라 불렀던 음력 시월
  바쁜 생활 속에서 자연의 선물 느껴보길

   11월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입동(立冬)’은 벌써 지났고 오래지 않아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에 닿을 것입니다. 음력 시월에 이미 접어들었으니 음력이든, 양력이든, ‘계사년(癸巳年)’의 뱀이든, 제 자리의 끝을 향해 스르르 스르르 흘러가는 중입니다.

   은현리 들판도 쓸쓸하게 비었습니다. 추수는 벌써 끝났고 빈 들판에는 짚단을 희고 검은 비닐로 둥글게 말아놓은 것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습니다. 울산의 겨울 철새인 까마귀 떼들도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활엽수 나무들도 잎을 지우며 월동준비를 하며 사람들도 옷장 속의 두꺼운 옷들을 준비합니다. 김장준비며, 난방준비며 마음이 스산해집니다. 가끔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아 빈주머니를 뒤지기도 합니다.

   저는 어느 글에서 11월에 대해 ‘사람이 나무 앞에 서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나무 앞에 서서 새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열매로, 열매에서 낙엽으로 나무가 걸어온 이 한 해의 길에 대해 묵상하고 그리하여 12월이 왔을 때 자신이 가졌던 것을 다준 나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묵상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로 달을 쓰는 우리에게 11월은 11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람들이 그렇게 스산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11월은 여전히 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달입니다.

   슬기로운 인디언들이 만들어 썼다는 달력을 본 적이 있는지요? 인디언 달력은 부족마다 다른데 크리크족은 ‘물빛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체로키족은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테와 푸에블로족은 ‘만물을 거둬들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또 히다차족은 ‘강물이 어는 달’, 위네바고족은 ‘작은 곰의 달’, 키오와족은 ‘기러기 날아가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그중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달력은 아라파호족의 11월입니다. 그들은 11월을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휴일엔 경주 감포항에 들려 20년쯤 단골로 다니는 바닷가 작은 밥집에서 이제 막 제철이 시작됐다는, 속이 따뜻하게 풀리는 꼼치(바다메기)국을 먹었습니다. 11월에도 새로 시작되는 것이 있어 즐거웠습니다.

   어제는 밀양 얼음골 사과밭들 사이 ‘얼음골옛길81’이란 예쁜 도로명 주소에 단아한 세컨하우스를 마련하고 사는 시를 노래하는 후배의 집에 갔습니다. 마당에서 향기가 은은한 모과들을 줍고 이번 주부터 수확을 시작했다는 얼음골사과 몇 알을 깎아먹으며 11월이 우리에게 베푸는 선물에 행복했습니다.

   이날 사과밭에서 보았습니다. 사과나무가 11월에 사과를 선물하기 위해 사과꼭지를 아주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손을. 사람의 을씨년스러워지는 계절과는 달리 자연의 11월은 모두 사라지지 않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실 계절도 그러합니다. 얼마 전 은현리 마당에 봉숭아가 피었습니다. 꽃이 제철에 피지 않으면 ‘철이 없다’ 하지만, 11월과 나란히 가는 음력 시월을 두고 옛사람들은 ‘소춘’(小春)이라 이름했습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 봄이, 그것도 키 작은 봄이 잠시 머물다 간다는 말입니다. 음력 시월을 ‘작은 봄’으로 부른 것은 자연에 대해 맑은 눈을 가졌던 선인들이 남긴 참으로 지혜로운 은유입니다. 서서히 떠나가는 가을과 서서히 찾아오는 겨울 사이, 그 사이에 계절의 간이역에 봄이 여행 가방을 들고 서있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은현리에 살며 어느 해 소춘에는 목련이 피었고, 또 어느 해는 봄나물인 냉이 새싹이 올라와 늦가을 밥상에 때 아닌 냉이나물을 즐겼습니다. 자연의 선물을 읽어내지 못한 채 무심하게 달력만 넘기며 사는 도시 사람들은 모를 일입니다. 분, 초 단위로 시계만 보며 달려가는 속도의 사람은 더더욱 모를 일입니다.

   바코드의 디지털 시대는 자연이라는 경전을 오류라고만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1월도 살아있는 달입니다. 당신의 11월은 어떤 달입니까? 11월은 저에게도,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은 달입니다.

<위 글은 경상일보 2013년 11월 15일(금)자 19면에서 발췌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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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진석 2013-11-15 13:25:53
좋은 기사에 감명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