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인문학칼럼] 박태일 교수
[국제신문 인문학칼럼] 박태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08.2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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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황, 지역문학사의 첫 디딤돌

 일제 더러운 뭍 헐고 새 뭍 짓는 무기가 자신이 쓴 시라던 그가 보인 삶과 작품 지역문학 의기 대변

   부산 김해공항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덕두 마을이 있다. 그곳 낙동강 둑, 자그마한 시비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배재황(1895~1966)이 쓴 '오막살이'다. 잘 다듬었다. 배재황은 진해 웅동 대장리 사람이다. 아버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향리의 민족사학 계광학교 고등과를 수료했다. 서울로 올라가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을 배웠다. 열아홉 살 때인 1914년부터 모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교가도 손수 지었다.

   1919년 기미만세의거는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4월 웅동의 만세의거 중심에 그가 섰다. 등사기를 사고, 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았다. 검거 선풍이 불자 진해를 빠져나왔다.

   먼 북녘 정주 오산학교 조만식 선생 밑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몇 해 뒤 고향 가까운 김해 진영에다 터를 잡았다.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 소작쟁의가 가장 잦았던 곳이 남강과 낙동강을 낀 김해 들이다. 거듭하는 수탈로 가난만이 키가 자란 물가였다.

   배재황은 진영 둘레 면 지역에 '의신계(義信契)'를 만들었다. 박간(迫間)을 비롯한 왜로 대지주를 상대로 소작 투쟁을 벌이기 위한 풀뿌리 결사체였다. 김해농민조합도 앞장서 이끌었다. 피검, 석방, 벌금 부과, 재산 압류 그리고 다시 피검을 거듭 겪었다. 왜경의 눈초리에 갇혀 엎드려 지낼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을유광복이 되자 그는 우뚝 일어섰다. 진영읍에다 한글강습소를 열었다. 땅을 농민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이어진 좌우대립으로 더 머물 수 없었다. 1947년 배재황은 낙동강 물끝 하단 갈대밭 속으로 몸을 숨겼다. 오막살이를 짓고 부산 시민이 가져다 붓는 똥물을 져 날랐다. 가난과 홍수를 이불처럼 덮고 산 세월이었다. 그러다 1966년 이승을 뜬 뒤에야 웅동으로 돌아갔다. 지역 농민항쟁사에서 핵심 인물인 그의 잊힌 귀향이었다. 1996년 간행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의 배재황 이름 뒤에 '생몰년 미상'이라 적히게 된 내력이 이렇다.

   그런데 배재황은 지역 근대문학사에서 볼 때도 뜻 깊은 이다. 최남선이 낸 종합지 '청춘'은 1914년에 창간했다 1918년에 폐간 당했다. 거기 독자문예란은 피식민지 노예인 우리 청년들이 한글 작품을 투고, 발표할 수 있는 첫 마당이었다. 9호부터 현상문예로 바뀐 그곳에 배재황은 시와 단편소설, 수필이 잇달아 당선했다. 그는 근대 매체와 제도를 통해 한글로 작품을 발표한, 경남부산의 첫 문학인인 셈이다. 계광학교 교사 때 일이었다.

   '청춘' 10호(1917)에 실은 수필 '일인과 사회'에서는 한 몸, 한 사람이 모여 사회가 되고 인류가 되니 '새 사회를 만들' 사람으로서 '청년'은 '새 사회 만들 큰 힘'을 '허비'하지 말 것을 소리 높였다. 소설 '뽀뿌라 그늘'에서는 어린 남매를 키우던 홀어머니가 보람으로 삼았던 아들이 죽자, 추억이 담긴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비탄에 젖는 모습을 그렸다. '청춘' 12호(1916)의 당선시가 '내 노래'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꽃과 달 예쁜 맵시 읊기가 싫고/엿과 꿀 깊은 단맛 노래 안 해요/희망의 저쪽 끝에 달렸는 보람/따랴고 얻으랴는 참된 내 노래//핏방울 뿌린 종이 어리인 내 시/한바다 물결처럼 높낮이 있어/더런 뭍 헐고 씻어 새 뭍 짓고저/두 주먹 힘차게 쥔 날센 내 노래//머리로 돌을 처서 골장이 나와/목숨이 끊어지나 다시 돌을 쳐/세상에 머러타는 욕을 들어도/자아를 안 꺾는 것 굳센 내 노래'. 스물세 살 청년 문학인 배재황의 힘찬 포부가 잘 담긴 작품이다.

   '핏방울 뿌린 종이' 위에 쓴 자기 시는 '더런 뭍 헐고' '새 뭍'을 만드는 무기라 했다. 오늘날 낙동강 둑에 새긴 '오막살이'로는 가늠하지 못할 기백이 드높다. 배재황은 쉰 살 초반에 이미 세상에서 쫓겨나 하단 갈대밭 이름 없는 늙은이로 머물다 갔다.

   그러나 그가 펼쳐 보인 삶과 문학은 근대 초기 경남부산 지역문학의 의기를 아낌없이 대변한다. 문학과 문학인이 마냥 비루할 따름인 오늘에 이르러 더욱 두렵고도 귀한 본보기 아닌가.

<위 글은 국제신문 2013년 8월 22일(목)자 27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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