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신문 경남시론] 정일근 교수
[경남신문 경남시론] 정일근 교수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13.04.0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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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패스워드쿠스’의 불편한 진실- 정일근(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원장·시인)

  최근 어느 종합병원에서 목격한 일이다. 당신의 진료기록을 청구하러 온 한 할머니가 주민등록증을 가져오지 않았다. 병원 측에서는 복도에 설치된 무인민원발급기를 이용해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초본을 발급해오면 된다고 했다. 무인민원발급기는 본인의 지문만 인식된다.

  문제는 무인민원발급기가 그 할머니의 지문을 인식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모습에서 거친 삶을 살아온 모습이 역력했다. 손에 지문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아 무인민원발급기는 할머니의 신분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그 할머니는 발만 동동 구르다 자신의 진료기록부를 받아 다른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을 예약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마을의 주민센터에서는 주민등록증이, 무인민원발급기에게 민원인의 지문이 패스워드다. 무인민원발급기는 패스워드에 문제가 있다면 무능민원발급기가 된다, 나는 그 할머니의 고충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의 손에도 지문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무인민원발급기 사용을 할 수 없다.

  주민센터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진땀을 꽤 흘려야 한다. 지문인식기는 거부하고 주민등록증을 제출하고 인감도장을 가져가도 주민센터의 원칙은 지문인식기를 통과해야 하는지 5분이면 충분한 민원에 30~40분의 시간을 빼앗기기 일쑤다. 하도 답답해 새 지문을 등록해달라고 해도 그건 안 된다고 한다. 지문이 사람의 패스워드인데 그 비밀번호를 쉽게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패스워드를 요구하는 사회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전 국민이 가장 많이,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도 자신이 입력한 패스워드를 모르면 화면이 열리지 않는다.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면 포털 사이트의 전자메일을 사용할 수 없다. 은행의 현금카드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내 돈이지만 찾아 쓰지 못한다. 비밀번호가 넘치다 못해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보통 10여 개 이상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전자키를 단 집의 경우 비밀번호를 모르면 집에 들어갈 수도 없다.

  비밀번호는 주머니나 수첩에 넣어 보관하는 ‘증’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머릿속에 외워서 넣어 다녀야 한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는데 외우지 못하면 열리지 않는 문이 도처에 수두룩하다.

  하지만 패스워드가 범람하는 시대에 소외받는 계층이 많다. 패스워드 때문에 인격을 무시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어도, 무인민원발급기 등 각종 서류발급기가 급증해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건 분명히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당국은 기계 설치에 앞에 사용하지 못하는 사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말이다.

  인권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며 인간답게 살 권리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마다 외모나 교육 정도, 사는 형편 등이 제각기 달라. 하지만 한 가지 같은 게 있지. 사람에겐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 있다는 것!’이라고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인권에 평등하지 않다.

  나는 얼마 전 패스워드에 비판적인 시를 쓰면서 패스워드가 만능하고, 패스워드만을 신봉하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 대해 ‘호모패스워드쿠스’(Homo Passwordcus)라는 신조어로 명명했다. ‘호모패스워드쿠스’가 경계해야 할 것은 풀리지 않는 암호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의 사이버 테러 앞에 ‘호모패스워드쿠스’의 패스워드를 지켜주는 기관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은행의 내 돈이, 내 신상정보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지 불안했다. 더 큰 문제는 IT강국이라는 우리나라가 사이버 테러의 범인을 잡아내지 못하는 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호모패스워드쿠스’여. 당신의 존재며 신봉인 패스워드는 안전한가?

- 위 글은 경남신문 2013년 4월 1일자 23면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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