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중조의 고금산책] 기념비 없는 경남대학교
[홍중조의 고금산책] 기념비 없는 경남대학교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6.12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남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을 맞았다고 지금 한창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인지 시민도 들떠 있는 모습들이다.

말이 60년이지, 이 같은 역사를 지닌 대학이 전국에서도 그리 흔치 않다.

돌이켜보면, 해방 이듬해에 출발한 국민대학에서 한국전 후에 해인대학으로 3.15의거 이듬해에 마산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기도 했다. 1970년 들어와서야 경남대학교로 바뀌면서 힘찬 거보를 내딛었던 것이다.

60년의 세월 속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배움의 전당으로 국내서도 손꼽히는 사학의 명문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만큼 경남대의 역량과 위상은 날로 증대되어 감을 실감하고 있다.

특히 이번 60주년 행사를 뜻깊게 하기위해 문화공연 체육대회, 학습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축제의 장을 펼친다고 한다.

잔치판에 신명이 나야할텐데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서운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다. 경남대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3.15의거와 10월 부마항쟁기념비를 지금까지도 건립해놓지 않고 있다는데 하는 말이다. 뭐니뭐니 해도 3.15와 부마항쟁은 경남대 60년사에 빼놓을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3.15의거 전체를 볼때 그 누구보다도 앞장선 해인대학생의 시위 또한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시 마산시민을 용공분자로 몰고가려는 공포정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봉기했다는 것은 특기할 사실이다.

제2차 의거가 일어난 4월 13일이었다. 10시 40분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100여명의 대학생이 시청앞에 집결해 자유당 정권을 성토하고 나섰다. '피로서 찾은 자유! 총칼로 왜 뺏느냐' '보장된 기본인권 그 누가 뺏을손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감행했던 것이다. 김주열군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 앞에서 성토대회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민주제단에 신명을 바친 김주열군의 정신을 우리 학생들은 영원히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우리는 비폭력적으로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선언문을 낭독한 학생대의원회 의장인 장덕수(張德守·24)대표의 감정에 북받쳐 울먹이는 음성이 수많은 군중을 숙연케 했다. 이같은 해인대학생의 시위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감행한 거사였다.

이같은 선배들의 3.15의거정신이 뜨겁게 살아있었기에 제2의 '3.15'라고 일컫는 10월 18일 부마항쟁의 불길이 치솟고 말았다.

의거정신은 후배 경남대생의 혈관속에 뜨겁게 계승되어 새롭게 부활하고 말았다. 그토록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총칼에 분연히 맞서 항쟁한 결과 악명높은 유신정권도 어이없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이토록 고통당한 역사의 산물인 '3.15 의거'와 '10월 부마항쟁' 이야말로 자유·민주를 쟁취하기 위한 경남대생의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정의를 살리겠다는 비장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과장된 말일지는 몰라도 한때는 '경남대생이 떨쳐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는 말이 근거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독재정권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지각변동의 진양지가 바로 경남대학교라는 곳이다. 학교가 자리잡고있는 대곡산 언저리인 홍골을 지적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개교 60주년을 계기로 이벤트도 좋지만 학교당국과 동문들이 공통으로 규모있게 의거비와 항쟁비를 건립해야만 한다. 4월 혁명의 진원지인 서울대, 고려대는 물론 광주항쟁의 분신인 전남, 조선대 등도 기념비를 세워놓고 있음을 본다. 더욱이 부산대는 부마항쟁기념관이 있지 않는가, 하물며 역사적 정당성과 가치가 높은 경남대에서 기념비를 건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유신의 그 아픈 기억을 말끔이 씻기 위해서도 기념비 건립을 서둘러야만 한다.

조간경남 5월 19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