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학년도 제8기 금강산 통일연수단 기행문
2006학년도 제8기 금강산 통일연수단 기행문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6.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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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보고 느끼며 - 노춘경 교사(마산합포고)


지난 5월 27일부터 5월 30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경남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금강산 연수를 다녀왔다. 한반도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과제를 해결할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로서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북한의 현재 상황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교사의 자질과 전문성을 제고하고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통일의식을 높이는 데 이번 연수의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연수를 통하여 얻은 지식과 경험을 교육에 접목함으로써 우리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미지의 세계와의 만남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우리는 주최측의 배려로 설악산에서 하루를 묵고 금강산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설악산으로 향하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높고 낮은 산들의 속삭임과 부지런한 농부의 경운기 뒤로 피어나는 대지의 살 냄새를 맡으며 서로 서먹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점심 무렵에 출발한 차는 저녁이 되어서야 설악산 숙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었다. 이때 소주 한 잔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내일의 여행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배낭을 정리하고 서둘러 잠을 청하였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설악산을 향했다. 점심때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져서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서 설악산을 감상하기로 했다. 나는 몇몇 일행과 함께 울산바위 쪽 산행을 택했다. 설악산에는 아직 봄이 남아있었다. 벚꽃이 마지막 자태를 뽐내며 봄의 끝자락을 잡고 있었다. 우리는 맑은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산을 올랐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수록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지는 듯했다. 꼭대기 바위산은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의 여행을 위하여 체력을 비축해 두어야겠다 싶어 무리한 산행을 하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이제 북한으로 들어갈 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는 강원도 고성의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금강산 관광증을 받고 북쪽으로 달려 남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출입사무소에 도착하니 전국에서 모인 금강산 관광객들이 마당에 가득했다. 우리는 사전 교육으로 북한에 들어갈 때는 휴대폰과 10배율 이상 쌍안경, 160mm 이상 망원렌즈 사진기는 안된다, 말도 함부로 하면 안된다, 사진도 마음대로 찍어서는 안된다 등등 안된다는 교육을 많이 받아서인지 모두들 긴장하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공항 검색대와 똑같이 생긴 검색대를 통과하여 타고 온 관광버스는 두고 금강산관광전용버스를 나누어 탔다.

안내조장의 설명을 들으며 남측 CIQ를 통과하는데 굵은 철책선이 분단의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비무장지대는 여느 시골의 한적한 들판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가깝고 쉬운 것을 지난 50여 년 간 통과하지 못하고 수많은 이산가족과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 싶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상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우리는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무표정의 북측 군인들이 우리를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어 우리는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목을 움츠리고 줄을 서서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속은 복잡하고 더디게 진행되어 그간의 분단의 골이 얼마나 깊었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수속을 끝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금강산관광전용버스에는 커튼이 없었다. 군사지역을 지나므로 보안상의 문제인 듯했다. 이동 중에 창 밖의 사진 촬영도 금지다. 곳곳에 마네킹처럼 서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북한 군인들이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근무수칙상 그리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서로 가고 오다 보면 언젠가는 금강산 비로봉에 쌓인 눈이 녹듯이 그들의 경직된 얼굴도 풀릴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북한의 풍경을 신기한 듯 관찰하였다. 북한의 산들은 민둥산이었고 전봇대는 남한에서 60년대나 본 듯한 나무전봇대였으며 집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에 색깔은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가끔씩 보이는 북한 주민들의 옷차림은 검은색 아니면 어두운 색이었는데 같은 동포로서 반가우면서도 연민의 정을 느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숙소인 해금강 호텔에 도착하였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금강산 온천에 들러 온천욕을 했다. 금강산에서 가장 기를 잘 받을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온천은을 말 그대로 신천지였다. 온천에 몸을 담근 채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을 감상할 수 있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온천을 마친 우리는 온정각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쇼핑을 했다. 아들 생각이 나서 몇 가지 기념품을 샀다. 그런데 온정각 앞에서는 'MBC 창작동요제'를 하고 있었다. 동요제를 보고 있는 동안 나는 북한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였으며 낮과는 달리 남한과 북한이 이렇게 가까워졌나 싶어 마음이 흐뭇했다.

우리는 다시 해금강 호텔에 도착하였다. 해금강 호텔은 장전항 바다에 떠 있는 해상 호텔이었는데 호텔 방 창문을 열면 바로 아래 바다가 보여 신기했다. 밤에 잠시 내려와 거드럭거리는 바다를 보면서 산책을 했다. 어머니 품에 안긴 듯 이런 저런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니 쉼 없이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소리는 넉넉한 위안이 되어 여행의 피로감과 북한에서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피곤함과 설렌 기분으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우리는 구룡폭포 코스로 갔다. 버스를 타고 금강산에 얽힌 전설을 들으면서 신계사와 키가 20m이상 곧게 뻗어 늘씬한 자태를 뽐내므로 미인송이라 불리는 소나무의 군락을 보며 목란관 주차장까지는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은 완만하고 잘 정리되어 있어 걷기에 편했다. 우리는 무공해 공기로 가슴을 가득 채우며 곳곳에 다리와 폭포, 담소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 금강산을 올랐다.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흘러 마시면 10년이 젊어진다는 삼록수를 마시자 금강문이 나왔는데 금강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자 옥류담과 옥류폭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멋진 풍경을 담아가려고 노력했다. 선녀들이 구슬 2개를 떨어뜨려 생겼다는 연주담과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듯한 비봉폭포를 보고 조선의 3대 폭포 중 하나인 구룡폭포를 만났다. 150m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늦어 서둘러 14개나 되는 가파른 철사다리를 올라 구룡대라는 전망대로 갔다. 구룡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머리가 어찔어찔, 속이 울렁울렁거렸다. 구룡대에서는 8개의 담소가 구슬을 꿰어 놓은 듯, 크고 작은 그릇에 옥빛 물을 담아 놓은 듯한 상팔담이 깎아지른 절벽에 녹아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구룡대에서는 계곡의 풍경을 맘껏 볼 수 있어서 북한 안내원에게 사진을 한 컷 부탁했더니 친절하게 찍어 주었다. 내려와서 목락관 앞 기념품 가계에 들렀는데 목각인형이며 여러 가지 산나물 등을 팔고 있었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문닫은 신라 천년사직을 통곡하고 예서 속죄의 삶을 살았을 때 먹던 산나물을 이제 다시 천년이 지난 후 그가 먹었을 산나물을 후세인은 선물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가지를 샀다. 그리고 올라가다 지나친 신계사를 들렀다. 신계사는 지금 복원 중이었는데 남북 불교계에서 같이 복원하고 있다니 후일에 다시 오면 그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산을 내려와 우리는 말로만 듣던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맛보았다. 서비스를 해 주는 북한 아가씨가 아주 예뻤고 냉면 국물 맛이 담백하게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냉면을 좋아하는 아내 생각이 나서 다음에 꼭 가족과 함께 오리라 마음먹었다. 옥류관 앞에서 가족들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 기념촬영을 하고 어제 간 금강산 온천을 다시 가서 피곤한 다리를 풀며 다시 한번 감탄을 했다.

오후에는 평양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묘기를 척척 잘도 해내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절로 나왔고, 같은 동포라서 더욱 그 묘기가 빛나 보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묘기 뒤에 북한의 어두운 현실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우리는 잠시 쉬면서 저녁을 먹은 뒤 '윤이상 음악회'를 감상했다. 윤이상평화재단 주최로 열린 이번 윤이상음악회는 윤이상 선생이 생전에 제안했던 휴전선 민족합동음악축전 기획을 계승하고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남북의 악단이 한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것을 보니 감동적이었고 북한에도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음악회를 보고 우리 일행은 협의회를 가지며 그동안의 일정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었다.

다음날 새로운 금강산 풍경을 기대하며 일어나 보니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오늘은 만물상 코스를 보게되는데 금강산의 웅장하고 기묘한 산악미를 대표하는 코스로서 기대가 되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관음연봉, 곰바위, 육화암에 얽힌 전선을 들었다.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이라고 불리는 산 봉우리 같은 거대한 바위들이 키 순서대로 보기 좋게 계곡의 왼편에 서 있고, 오른편 산 중턱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송곳 같은 바위가 홀로 우뚝 서 있다. 독선암이라고 한다. 네 신선이 바둑을 두는데 한 신선의 훈수가 지나쳐서 미움을 받아 쫓겨났고, 할 수 없이 멀찍이 물러나 홀로 서 있어서 독선암이라는 안내조장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버스는 70여 구비를 돌아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올라오는 사이에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거세어졌다. 과연 정상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까? 만물상의 절경을 볼 수 있을까? 걱정되어 비바람을 맞으며 경치가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다 돌아갔다는 천선대를 행해 강행군을 했다. 삼선암, 칠층암, 망장천 등이 있다고 했는데, 비바람이 치고 돌풍 속에서 가파른 철 계단을 간신히 오르느라 어디가 어딘지 확인하지 못했다. 또 악조건 속에서 가파른 길을 올랐더니 얼마 전에 다친 허리와 다리가 아파와서 '참으로 여행은 보약이요 고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개 낀 금강산은 정말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천선대를 돌아 나오자 만물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안개가 가득 끼어 그 이름처럼 만물의 모습을 닮은 바위와 봉우리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망양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만물상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30분을 기다렸으나 끝내 만물상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산을 내려왔다. 하지만 만물상은 나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은 날씨가 조금 개고 안개가 걷혀서 암석의 주상절리(柱狀節理)가 이루는 갖가지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바위의 형상은 환호하는 군중의 무리와 같았다. 앵무새와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거북이나 물개의 모습을 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가냘프도록 솟아 숨결에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것도 있는가 하면 가위눌릴 만큼 거대하게 솟은 바위도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멋진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람이 태어나 중국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을까?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금강산을 보지 않고 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을 하고 싶다.

만물상 코스를 마지막으로 금강산 연수를 마치고 우리는 아쉬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올 때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북측 출입사무소에 들러 지루한 수속을 밟았다. 수속을 끝내고 잠깐사이에 남한으로 넘어왔다. 내려오면서 어느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는데 왠지 모를 편안함에 모두들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언젠가 평양에서 이런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기를 기대하면서.

이번 여행은 금강산의 아름다음을 맘껏 느끼고 북한의 실정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어서 매우 뿌듯했다. 여행은 그저 편안하게 본대로 느낀 대로 담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 관해서, 민족에 관해서 좀더 깊게 와 닿는 기회를 가졌다면 한층 의미 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수는 뜻깊은 연수였고, 주최측인 경남대학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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