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8) 끝 제2도약 - 월영캠퍼스 시대의 개막
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8) 끝 제2도약 - 월영캠퍼스 시대의 개막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6.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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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확보하지 못하고 가교사에서 출발했던 우리대학은 1948년 2월, 서울 창성동에 교사를 마련하였으나,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가교사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7월에 부산으로 옮겨간 우리대학은 이후 합천 해인사로, 진주 강남동으로 옮겨 다니다가 1956년 4월, 마산 완월동에 안정된 교사를 확보하여 정착하였다. 하지만 완월동 캠퍼스는 교지가 협소하고 교육시설이 빈약했기 때문에 경남 유일의 종합대학 승격을 추진하던 경남학원의 시대에 들어서자 교사 이전을 적극 모색하게 된다.

그리하여 월영동의 옛 마산철도병원 부지를 확보하여 1973년 12월에 이전하게 된다. 우리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일제시대 마산철도요양소 설립 이후 병원으로 활용되어 왔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철도 종사자들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마산에 요양소 개설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우리대학 캠퍼스가 위치한 이 일대를 요양소 부지로 선정하고 1939년 12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41년 6월에 준공을 보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6일에 개소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산철도요양소는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고 일본 본토가 대대적인 공습을 받게 되자 공습을 우려하여 함경도 원산에 요양소를 신축하여 환자를 옮기고 1945년 5월 12일자로 폐쇄함과 동시에 동일자로 철도종업원양성소로 개편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이 곳에 미군이 주둔하여 그 병영으로 사용하였으며 경찰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만주와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귀환동포수용소로 점용되어 120세대가 입주하기도 하였다.

1949년 4월 10일에는 이곳에서 마산교통요양원이 개원되었다. 동 요양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병원으로 징발당하기도 하였다. 1960년에는 요양원의 명칭이 마산교통병원으로 변경되었으며, 1963년 9월 1일에는 철도청이 외청으로 독립하자 마산철도병원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마산철도병원은 교통부 직원의 결핵관리와 치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개원 20년만인 1969년 말에 문을 닫았다. 이 부지를 매입하여 우리대학이 이전하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월영캠퍼스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으로 이전한 우리대학은 1973년 본관(현 인문관) 준공을 필두로 도서관(1974, 현 국제교육관), 성훈관(1975, 현 제3공학관), 제2호관(1976, 현 제3자연관), 연구회관(1977, 현 국제교육관), 제4호관(1979, 현 교육관), 제5호관(1980, 현 제2자연관), 중앙도서관(1980) 등의 건물이 준공되면서 종합대학으로 가는 터전을 일구어 갔다.

1973년 1월 11일에는 경영대학원 설립 인가를 받아 석사과정에 경영학과, 무역학과, 행정학과가 신설되었다. 이 대학원은 경상남도 최초의 대학원이기도 하였다. 1976년 1월 22일에는 대학원 설립 인가를 받아 행정학과와 법학과를 신설하였다. 이에 따라 경영대학원 행정학과는 폐지되었다. 1977년 1월에는 대학원에 영어영문학과가 신설되었으며, 1978년 2월에는 국어국문학과와 경제학과가 신설되었다. 1979년 12월에는 정치외교학과와 경영학과가 신설되었으며, 박사과정에 경제학과가 신설되었다.

같은 날 교육대학원의 설립 인가를 받아 교육학과에 교육행정 및 사회교육의 2개 전공이 개설되었다. 1980년 11월에는 교육대학원에 체육교육전공, 수학교육전공, 국민윤리교육이 신설되었다. 1981년 11월에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정치외교학과와 법학과가 신설되었다. 또한 교육대학원에 국어교육, 영어교육, 물리교육, 화학교육, 생물교육, 가정교육 등의 전공이 신설되었고, 사회교육전공이 일반사회교육전공과 역사교육전공으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교육대학원의 개설 전공 수는 12개로 대폭 늘어났다.

이 시기 학과의 증설도 대폭 이루어지게 되는데, 1970년 12월에는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가 10명씩 증원되어 정원 40명의 국어교육과와 영어교육과로 개편되었으며, 체육교육과가 40명으로 10명이 증원되었다. 1971년 12월에는 정원 20명의 의상학과와 미술교육과가 신설되고 경영학과의 학생정원이 20명에서 10명 증원되어 30명이 되었다. 1972년 12월에는 정원 30명의 음악교육과가 신설되고, 의상학과가 20명이 증원되면서 가정교육과로 개편되었다. 또한 무역학과와 경영학과의 정원이 20명 및 10명 증원되어 각각 40명이 되었다.

1973년 12월에는 30명 정원의 수학교육과, 일어교육과, 행정학과, 경제학과가 신설되었다. 1974년 12월에는 국어교육과, 영어교육과, 수학교육과, 일어교육과의 정원이 10명씩 증원되어 40명이 되었으며, 미술교육과와 법학과는 10명씩 증원되어 30명이 되었다. 1975년 12월에는 정원 40명의 국제개발학과와 화학공학과가 신설되었으며, 행정학과, 미술교육과, 음악교육과의 정원이 각각 10명씩 증원되어 40명이 되었다. 1976년 12월에는 정원 30명의 사학과와 40명의 화학과 및 회계학과가 신설되었다.

1977년 12월에는 정원 80명의 전기공학과와 기계설계학과가 신설되었으며, 법학과, 사학과, 경제학과의 정원이 10명씩 증원되어 각각 40명이 되었고, 경영학과와 무역학과가 80명씩 증원되어 각각 120명이 되었다. 1978년 10월에는 80명 정원의 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와 정원 40명의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물리학과,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가 신설되었으며, 5개 학과에 2부 과정이 개설되었다. 이때 개설된 2부 강좌는 정원 60명의 기계공학과와 정원 40명의 전기공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회계학과였다. 이로써 1979학년도 신입생 정원은 주간 27개 학과 1,400명과 2부 5개학과 220명으로 총 1,620명이 되었다.

1979년 9월에는 정원 40명의 중어중문학과, 생물학과, 전자계산학과, 공업경영학과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2부에 각각 40명 정원의 행정학과, 경제학과, 공업경영학과가 개설되었다. 또한 회계학과와 체육교육과의 정원이 각각 40명씩 증원되어 80명이 되었으며, 국제개발학과가 외교학과로 개편되었다. 1980년 10월에는 어문학계에 20명 증원되어 140명이 되었고, 사학과가 10명이 증원되어 50명이 되었으며, 이학계에 30명이 증원되어 50명이 되었고, 법정계에 100명이 증원되어 260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모집인원 2,830명에 졸업정원은 2,180명으로 늘어났다.

1981년 10월에는 졸업정원 40명의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사회학과, 수학과, 교육학과, 식품공학과, 요업공학과와 졸업정원 20명의 철학과가 신설되었다. 또한 인문 사회교육계의 국어교육과, 영어교육과, 일어교육과에 각각 10명씩 30명이 증원되어 150명이 되었고, 자연교육계의 가정교육과, 수학교육과와 예능교육계의 음악교육과, 미술교육과에 각각 10명씩 증원되어 100명으로 늘어났다. 사회계의 법학과, 행정학과에 각각 20명씩 40명이 증원되어 240명이 되었고, 자연계의 전자계산학과, 건축공학과에 각각 10명씩 20명이 증원되어 100명이 되었다. 또한 외교학과는 정치외교학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단과대학을 신설하였는데 야간강좌를 포함한 학과 및 졸업 정원을 살펴보면, 문리과대학은 12개 학과 520명, 사범대학은 9개 학과 470명, 경상대학은 4개 학과 560명으로 조직되었으며, 법정대학은 3개 학과 300명, 공과대학은 11학과 760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1982년 3월, 모집인원 3,393명에 졸업정원 2,610명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김상민 연구위원(기록물관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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