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박재규 총장 "北, 南의 중재역할 여지 줘야"
[한국초대석] 박재규 총장 "北, 南의 중재역할 여지 줘야"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4.0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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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6자회담·NPT 복귀 의지 보여야 남·북, 북·미 관계 풀려"
1973년부터 경남대 운영…올해 개교 60주년 맞아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대한민국 공군 1호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트랩으로 나온 김 대통령은 먼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몇 초 후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 공항까지 달려 나와 박수를 치고 있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발견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광폭 영접이다. 천천히 트랩을 내려온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두 손을 맞잡았다….

전 세계 외신들은 이 순간을 일제히 긴급 뉴스로 타전했다. 한반도에 냉전의 20세기를 접고, 되돌릴 수 없는 화해와 협력의 21세기를 여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순간에 조용히 현장을 지키고 선 또 한 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의 총괄 책임자였던 박재규 통일부 장관(1999년∼2001년 재임ㆍ현 경남대 총장).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 그도 이 순간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다.

"모두들 속으로 '와∼!' 했어요. 꿈을 꾸는 것만 같고…. 너무도 감격해서 15년간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까지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할 것이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김 위원장 답방, 시기적으로 덜 성숙

박 총장은 한국에서 김 위원장을 가장 많이 만난 인사이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해 9월 통일부 장관으로 방북해 단독 면담,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 일행으로 오찬 회동 등 총 세 차례나 김 위원장을 가까이서 만났다. 전문가들 사이 김 위원장의 '복심'을 읽어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국내 인사로 박 총장을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만나 본 김 위원장에 대한 인상을 소개했다.

박 총장은 우선 "초면에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하는 편이지만 몇 차례 만나고 나면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끄는 성격"이라고 평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농담도 하는 등 한번 자리에 앉으면 2∼3시간 재치 넘치는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직접 만나보니 '독재자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더라는 얘기다.

그래서 북한에서 김 위원장의 카리스마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박 총장의 판단이다. 일각에서 김 위원장에 대한 북한 군부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카리스마는 197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 주석과 함께 국가를 통치한 데서 연유하며, 이는 북한 사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김 위원장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게 박 총장의 견해다.

최근 위조 지폐, 인권 문제 제기 등으로 6자회담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 박 총장은 우선 6ㆍ15 남북 공동선언에서 김 위원장이 약속한 '적절한 시기의 답방'의 의미부터 제대로 새겨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적절한 시기'의 뜻은 첫째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서울에 갈 만큼 남북관계의 진전이 덜 됐다는 것이고, 둘째 북-미 관계 역시 남북관계 개선의 수준만큼 가야 마음 놓고 답방할 수 있다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제3국에서의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은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남한을 답방해 정상회담을 연다는 것은 '적절한'의 의미를 놓고 볼 때 시기상조라는 얘기다.

더욱이 지난해 6월 김 위원장을 만났을 때 김 위원장은 박 총장의 해석에 동의를 표했다.

김 위원장은 "박 선생이 남쪽이나 외국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를 챙겨보고 있다"며 "그 중에서도 내가 서울 답방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유에 대한 박 선생의 설명은 내 생각과 꼭 일치한다"고 스스로 답방에 대한 입장을 에둘러 밝혔다.

박 총장은 "현 상황에서 공은 북한에 가 있다"고 본다. "현 상황을 풀려면 북한이 먼저 5차 6자회담 복귀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핵확산방지조약(NPT) 복귀 등 협상을 시작하는 게 수순"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난해 9ㆍ19 공동성명까지 나온 마당에 미국도 더는 판 자체를 악화시키지는 않을 것이고, 북한 입장에서는 위폐 문제 등은 대화하다 보면 풀릴 것이란 대범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이다. 여하튼 현 상황에서 북한이 계속 시간만 끌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것이 박 총장의 생각이다.

특히 미국은 지난해 9ㆍ19 공동성명에 합의할 당시 한국이나 중국의 요청을 다 들어줬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한국도 더 이상 북한 입장만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덧붙인다. 북한이 잘못된 정세 판단으로 한국마저 중재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정부 차원의 북한 인권 쟁점화 신중해야

평소 박 총장은 남-북-미 간의 선순환적 관계를 강조한다. 조정기를 겪고 있는 한미 동맹이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남-북-미 간의 선순환적 패러다임이 중요하다는 논리다.

여기서 한미 관계와 남북 화해가 파열음을 내지 않는 전제 조건은 북-미 간의 관계 개선이고, 이를 중재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북한도 한국을 배려하는 전략적 접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럼 남남갈등의 불씨이자 대북 정책의 딜레마이기도 한 북한의 인권 문제는 어떻게 풀 것인가.

일단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북한 인권을 쟁점화 하는 것은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북한 내부가 자신감이 붙어 정치수용소나 교화소의 인권 개선에 실질적인 희망이 보일 때 이야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체제 유지가 '발등의 불'인 북한 정권에 체제 문제와 직결되는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다만 도덕적 명분을 중히 여기는 시민단체 등이 그것을 제기를 하는 것은 별개로 판단할 문제 아니냐는 것.

혹자는 서독도 통일 전에 동독에 인도적,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도 동시에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며 우리 정부의 태만을 나무라지만,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남북한은 독일의 상황과 기본적으로 같을 수 없다는 것이 박 총장의 주장이다.

박 총장의 개인사는 평범하지 않다. 차라리 일종의 오기로 차 있다.

그는 1944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함께 가족이 귀국해 터를 잡은 곳이 조부모가 살고 있던 경남 마산 근처 진해만을 낀 바닷가 마을 옥계다. 결국 옥계가 고향이 된 셈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정치망으로 멸치, 갈치를 잡는 배 몇 척을 거느린 선주였다. 말이 좋아 선주이지 뱃사람 일이 그런지라 살림은 늘 아슬아슬했다. 초등학교도 산을 넘어 두 시간 이상 걸어 다녀야 했다.

그가 대처를 구경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메고 마산 친척집으로 공부하러 나왔다. 겨우 철들 무렵 시작된 그의 '집시 생활'은 촌구석 옥계에서 마산으로, 다시 서울로 나중에는 미국으로 이어졌다. 또 무남독녀 부인과 결혼해서는 처가살이로….

여하튼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명문 마산고등학교에서 서울로 전학하려고 한 때였다. 그러나 전학은 뜻대로 안됐고 결국 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리고 1963년 미군부대 병사들에게 회화 몇 마디 배운 뒤 미국 뉴욕으로 용감하게 날아갔다. 유학 생활 고생은 대충 짐작가는 바다. 그러나 그는 스승 복은 있었다. 국제정치학의 대가 한스 모겐소, 존 허츠 교수, 좌파 경제학의 석학 피터 와일리스 교수가 그가 배웠던 학자들이다.

70년 군 문제로 귀국한 그에게는 군 제대와 함께 새로운 인생이 기다렸다.

경영난 위기를 맞은 경남대학교를 살리는 임무였다. 그가 실제로 대학 운영을 맡은 때는 1973년.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0대 말이었다. 밤낮없이 뛰었고 결국 해냈다. 올해 경남대학교는 60주년의 전통을 자랑하게 됐다. 박 총장은 30여 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그저 까마득할 뿐이다. 거의 모두 허허벌판에서 일궈낸 것이다.

극동문제연구소, 통일안보 분야서 명성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도 지금은 최고의 통일안보 연구기관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1972년 문을 열 당시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창립 당시 연구소 멤버는 소장인 그와 연구원 염홍철(현 대전시장)씨 등 2명이 전부였다. 경영자로서 박 총장의 저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슬하에 2남을 뒀다. 경남대가 마산에 있는지라 왔다갔다 하며 따로 살림하기도 힘들어 결혼 초 처가에 얹혀 살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라며 웃는다. 부인은 이화여대와 경희대에서 강의하다 지금은 경남대에서 영시(英詩)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난해부터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고 윤이상 선생과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고 했지만 누구보다 남북화해의 열망만큼은 유별난 맥이 닿아 있을 터이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오는 29일 금강산에서 남북통일 윤이상 음악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그는 곧 북한을 방문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할에도 기대감이 크다. 손님으로 평양에 가 터놓고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면 2차 정상회담 등 현 상황을 풀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 그가 이번 방문에 동행하면 김정일 위원장과의 4차 면담이 성사될 성 싶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깡마른 체구에서 풍기는 서생의 이미지와 달리 폭넓은 친화력을 자랑하는 그의 비밀을 엿보는 듯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 주간한국 4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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