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우리대학
다시 읽는 경남대학교 60년사(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우리대학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4.0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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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


해방 후 1946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인 본교가 올해로 개교한 지 60주년을 맞이했다. 본교가 비약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던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마구성원 모두가 잘 인지하고 있으나, 설립 초기부터 1970년 이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구성원이 많은 것같다. 이에 개교 60주년에 즈음하여 초창기 우리대학 역사를 되짚어 보는 기획시리즈를 총 8회에 걸쳐 마련했다. 한마구성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엮은이 말>

우리대학은 국민대학관(1946), 국민대학(1948), 해인대학(1952), 마산대학(1961), 경남대학(1971), 경남대학교(1982)의 변천을 거쳐 개교 6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대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학으로 출범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간과해 왔었다. 우리대학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보다 2년이나 앞선 1946년에 설립된 해방 후 최초의 신설대학이다.

우리대학의 설립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환국하기 전인 충칭(重慶) 임시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 예견되던 1941년 11월, 독립 후 새국가 건설을 위한 건국강령을 마련했다. 이 강령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고, 해방 후 독립국가 건설의 기본이념을 제시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이 강령에서 교육의 균등을 강조하고 그 기본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서 1개 도에 1개 대학의 설립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를 분단하여 그 남쪽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간판을 내걸고 활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민동지회(新民同志會)라는 이름으로 우리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우리대학의 설립은 1946년 1월 초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숙소인 경교장(京橋莊) 등에서 심도 깊은 논의가 있은 뒤 같은 해 3월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발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 기성회의 진용도 임시정부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고문은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와 부주석인 김규식(金奎植)이 맡았고, 명예회장은 외교부장인 조소앙(趙素昻)이, 회장은 내무부장인 신익희가 맡았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지도부가 고문과 회장단에 포진하였고, 교육계 인사들을 포함하여 참여한 이사진만 40여 명에 달하였다. 이는 우리대학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대학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대학'이라는 명칭은 '국민의 대학'이라는 뜻에서 정해진 것이었다. 미군정 하에서 국립을 내세울 수 없었으므로 1920년대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예와 같이 '국민대학'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국민대학'이라는 명칭은 대학의 고유명칭이라기 보다는 '국립대학'에 대응한 명칭이었던 것이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4월,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대학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가 해당 대학 구성원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되자, 미군정은 다음 달인 5월에 전면적 개편을 모색하였다. 즉, 일제시대의 경성제국대학을 개칭한 서울대학을 중심으로 경성의학전문 경성법학전문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수원농림전문 등의 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구성하고자 하는 '국립서울대학안'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미군정에 의한 국립대학 설립이 대두되자 임시정부에서도 5월 18일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독립신보』 『중앙신문』 『중외신보』 등 좌우익 언론을 통해 민족대학 설립을 여론화하였다. 미군정의 교육통제정책으로 구상된 '국립대학안'은 정부가 수립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독립국가 수립'을 요구하고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 입장에서는 방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서는 미군정의 국립대학 설립이 대두되자, 우리대학의 설립추진을 언론에 공개하여 공론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날 다른 신문과 달리 『동아일보』는 '국립대학 설립준비'라는 제목 아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발족 사실을 보도하였다. 『동아일보』가 우리대학을 '국립대학'으로 보도한 것은, 미군정의 '국립대학설립안'에 대응한 임시정부 중심의 우리대학을 진정한 '국립대학'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데 미군정이 세우는 대학이 국립이 될 수 없으며, 우리대학의 설립이 단지 임시정부 인사 몇 명이 참가한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대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남조선신민당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보』와 같은 좌파 언론에서도 크게 환영하면서 보도한 것을 통해 볼 때 당시 우리사회가 찬탁 반탁으로 이념논쟁이 고조된 상황이었지만, 우리대학의 설립에 대해서는 좌우가 일치된 의견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미군정에서 7월 13일에 '국립서울대학교안'을 공표하자, 임시정부의 우리대학과 미군정의 국립대학 설립은 경쟁적으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대학은 설립인가는 물론이거니와 교사(校舍)도 확보하지 못한 채, 9월 1일에 미군정의 국립서울대학교와 동시에 개교하게 되었다.

'국민대학설립기성회'는 '법문(法文)'계통은 물론 '이공학부(理工學部)', 국민의 정신방면에 기여할 '종교학', '예과(藝科)'와 '의학부' 등을 포괄한 종합대학의 설립 구상을 그 설립취지서에서 밝혔다. 이 같은 종합대학 구상은 당시 일반 사립대학의 수준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일제 때 설립된 기존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대학을 세우려 했던 미군정의 계획과도 차별성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군정 하에서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종합대학의 설립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립인가도 받지 못하고, 교사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대학은 종합대학의 큰 뜻은 일단 접고 학부와 전문부를 두어, 법률학과와 정경학과만으로 구성된 대학관으로 출범했던 것이다.

우리대학은 건학 36년 만인 1982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비로소 설립 당시의 숙원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개교 6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6개 대학, 41개 학부(과), 6개 대학원에 학생 수만도 1만5천여 명에 달하는 경남의 대표대학으로 성장하여 명실상부한 명문사학으로 힘차게 웅비하고 있다.

김상민 연구위원(기록물관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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