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문학상 소설부문 으뜸상] 윤은진(국어교육 4) '그해 여름'
[10·18문학상 소설부문 으뜸상] 윤은진(국어교육 4) '그해 여름'
  • 경남대인터넷신문
  • 승인 2006.01.0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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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도 중순을 넘어 날은 한창 푹푹 찌고 있었다.

찜통 더위 가마솥 더위, 참으로 식상한 말이지만 그 말보다 딱 맞아떨어지는 말도 없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 몸에서 땀이 새어 나왔다. 그때 나는 그 더위에 딱 맞는 더 그럴싸한 말은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보온밥통 더위 압력솥 더위라고 하는 건 우스울 것 같았다.

어쨌든 나고는 가장 쾌적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중이었다. 유리창 너머 푸른 산들이 뻗어있는 방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주스를 홀짝이며 컴퓨터를 끼고 손가락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였다. 공장에서 스크류를 박지 않아도 되었고, 페인트 냄새를 맡아가며 기계 앞에서 씨름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밤에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가 나를 기다렸지만 가장 더운 한낮 나는 아파트 12층 에어컨 바람 밑에서 일을 할 수가 있었다.

2만 명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만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 시켜주면 되는 거였다. 그들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와 주민등록번호와 관리번호. 원래 그들이 담겨있던 처음 보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엑셀로 옮겨다 붙이면 되는 거였다.

나로서는 이런 호사스런 아르바이트를 얻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에 지장도 주지 않았고 내 시간에 맞춰서 기한 내에 일을 마무리 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기한은 2주였다. 2주 동안 2만 명이었다. 후딱 해놓고 마지막에는 느긋하게 쉬리라 다짐했다.

아줌마나 아저씨는 모두 친절했고, 방문 밖으로 얼굴만 내민 채 기분 좋을 정도의 호기심을 보여주었던 딸아이도 신선했다. 처음 현관에 들어선 내 눈에는 넓은 거실이 비쳤다. 그 거실은 무엇인가 부족한 듯했지만 그것은 곧 깔끔함으로 비춰졌고 알 수 없는 경외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56평 아파트 그 넓은 집 넓은 거실에는 딱 세 가지의 것이 있었다.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벽 안쪽에는 날씬하게 서 있는 에어컨. 에어컨과는 뚝 떨어져서 거실바닥에 놓여 있는 작은 텔레비전. 그리고 반대쪽 벽의 어중간한 위치에 붙어 있는 나무로 짜여진 2인용 소파.

우리 집이 떠올랐다. 좁은 공간에 온갖 것들로 꽉 차있는 우리 집 거실-이라고 하기도 뭣한, 현관과 방을 이어주는 곳. 물론 우리는 그 좁은 공간에서 상을 펴서 밥도 먹고 다닥다닥 모여 앉아 깔깔대며 텔레비전을 보았고 손님들이 오셔도 그리로 앉혔다.

이 집은 너무 완벽했다. 그 넓은 공간에 어떻게 우리 집보다 더 적은 수의 것들이 있는지. 그것은 가진 자의 여유였다. 그 순간에도 자기 자리를 못 찾은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닐 우리 집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처음에 아저씨는 어떻게 일을 하면 되는지 알려주었다. 30대 중 후반의 왜소한 체격의 사람이었다. 일은 간단합니다. 아저씨는 컴퓨터를 켜고 사람들을 불러낸 뒤 엑셀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오려 붙이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아저씨의 직업은 의학 분야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2만 명중에는 10명에 한 명 꼴로 비고가 달려있었는데 비고란에는 ○○정형외과, xxx성형외과, △△이비인후과 등이 쓰여져 있었다. 과거에 진료를 받았던 병원의 기록이 아닐까 싶었다.

아저씨가 쉽게 설명했던-사실 설명이기 보다 지시였지만-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2만 명의 정보를 한 줄씩 드래그 해서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그 일이 이름 따로, 주소 따로, 전화번호 따로...... 따로따로. 게다가 10명에 한 명 꼴로 비고가 있었으니 총 11만 번의 클릭질이 필요했다. 단축키를 사용해도 이건 총 11만 번이었다. 게다가 깔끔한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마우스만은 이상하게도 후졌는데 클릭을 하다보면 마우스가 제멋대로 다른 곳에 가서 클릭을 해대는 통에 20만 번의 클릭질도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2주라는 기한은 역부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1시간 동안 내가 옮길 수 있었던 사람은 고작 50명이 채 못 되었다. 온순해 보이던 그 부부의 모습이 갑자기 위선처럼 느껴졌다. 이런 마우스를 꽂아놓고 그렇게 단순한 작업인 것처럼 나를 속여먹다니. 2주 동안 20만원이었기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에 2만원씩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앞뒤 가리지 않고 좋아라 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그래도 첫날은 첫날이라서 더디겠거니 했다. 그 컴퓨터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인 것 같았다. 차마 그렇게 선량한 부부에게는 마우스가 말을 안 들어서 작업이 더디다고 할 수가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우리 집 마우스를 떼다가 붙였다. 한낱 마우스 때문에 부부로 하여금 나의 능력을 의심하게 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성격이었다. 언니는 며칠이 되도록 마우스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차피 곧 다시 갖다 달 거니까 궁금해 할 때까지 모른 척하고 있을 참이었다.

마우스를 바꾸고 나니 조금은 속도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녁 8시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가야했기 때문에 7시 반에는 그 집을 나서야 했다. 속도는 안 나고 아직도 갇혀 있는 많은 사람들. 어서 빨리 엑셀로 옮겨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반드시 2주안에 그 일을 끝내버리기로 결심을 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마우스를 바꿔 단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마우스를 바꾸는 것이 효과적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장 무식한 방법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내 기본적인 믿음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휴대폰 케이스를 도장하던 공장에서 불량이 있는지를 검사하는 일을 했다. 케이스에는 먼지가 하나만 붙어 있어도 불량이었다. 그런 것은 가차없이 버려졌다. 나는 긁히지 않도록 잽싸게 훑어본 뒤에 출하용 틀에 개수를 맞추어 쌓아 올려 갔다. 간혹 먼지는 케이스마다 하나씩 둘씩 붙어 나왔다. 잘 티도 나지 않는 먼지가 하나 둘씩 붙어있는 케이스를 불량통에 담다보면 어느새 수북하게 쌓이면서 결국 대형 불량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는 재빨리 관리자들에게 알리러 가야했다. 불량이 났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케이스에 먼지가 붙어서 건조로에 들어간 이상 달리 먼지를 잡을 수는 없는 상황인 거였다. 먼지를 잡는 방법은 다만 라인을 세우고 청소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단순한 방법밖에는 없는가 생각해 보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기도 했다.

가장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이 때로는 가장 현명하고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몸으로 깨우쳤다. 아마도 이 일도 그럴 것이었다. 그러니 내게 가장 현명한 방법은 손을 재게 놀려 마우스를 최대한 빨리 돌려대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전날보다 몇 시간 일찍 그 집을 찾았다. 2주안에 끝을 내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도 나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나는 그 집이 숨이 막혔다. 배 속에서 가스라도 올라올라치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집은 이상하게도 가족끼리 소곤소곤 얘기하는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벽 너머에 아줌마와 딸아이는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건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조용조용했다. 나도 조용조용할 수밖에 없었고 트림이 새어 나와도 바짝 긴장을 해야 했다.

첫날은 4시간 동안 겨우 300명을 옮겼다. 둘째 날은 500명, 셋째 날은 600명. 속도가 점점 붙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남은 사람은 1만 8천600명이나 되었다. 남은 기간은 1주일하고 나흘. 게다가 토요일 일요일 4일을 빼면 7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손가락을 재게 놀려도 한시간에 200명을 못 넘겼다.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요령이 좀 늘었다고 확인도 하지 않고 이쪽 저쪽 옮기다 보면 1889번과 1899번이 바뀌어져 있었고, 어느새 열 사람의 번호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옮겼다. 나의 눈알이 무슨 동 무슨 동의 누구 누구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아줌마와 딸아이는 한창 이야기를 소곤소곤 주고받고 있었다.

아저씨는 전에도 한 번 아르바이트생을 썼다고 했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같은 숫자의 사람을 그 시간에 다 옮기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2주에 15만원을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날도 덥고 오며 가며 고생이 많다고 20만원을 주겠다는 거였다. 감사했다. 나는 그 아르바이트생이 2주안에 일을 모두 해낸 이상 나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일의 진행이 더딘 것은 순전히 나의 탓이었다. 일의 난이도를 떠나서 얼마를 옮기지 못하는 나는 나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아주 기본 적인 컴퓨터 사용법만 알면서도 사람 옮기는 작업을 잘 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저씨뿐만 아니라 내게도 나의 능력을 속인 이상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었다.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일이란 게 별거 있나 싶어서였다.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 예전 아르바이트생만큼의 실력은 없을지 모르지만 노력하면 곧 속도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것은 무모했다.

예전 아르바이트생만큼은 하고 싶다는 알 수 없는 경쟁심리로 인해 나도 기한 내에 일을 마무리하고 말리라는 생각을 품었는데 그 생각은 며칠을 못 갔다. 이틀 동안은 경쟁의 심리였지만 사흘이 되도록 속도가 늘지 않자 어느새 그 생각은 나를 괴롭히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고 예전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외경심마저 느끼게 되었다.

아줌마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밥을 먹자고 했는데 퇴짜를 맞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겁먹은 사람처럼 기어 들어가는 말투였다. 나는 송구스러웠다. 나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 밥 먹을 시간이 있는가 싶어서였다. 그 순간에도 나는 아줌마가 모니터를 보고 아직도 2100번 대임을 확인할까봐 조마조마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다른 사람을 찾겠다고 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작업하는 방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은 그 옆에 붙은 화장실까지였다. 그 이상은 들어가 보지를 못했던 나는 며칠이 지나서야 그 집을 새롭게 볼 수가 있었다.

첫날에 보았던 세 가지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불현듯 이 집이 곧 이사갈 집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곧 이사가려고 가장 최소의 살림만 그냥 되는 대로 부려 놓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얼마 전에 이사를 왔던가. 첫 날은 깔끔하다고 생각했지만 장도 없이 그냥 바닥에 내려놓은 텔레비전을 보니 저걸 누워서 보는가 어쩌는가 싶었다. 소파에 앉아 다들 바닥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세 사람. 그러고 보니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띄었다. 텔레비전 옆에 있는 전화기였다. 전화기마저 맨땅에 놓여있는 걸 보니 이건 필시 이사가려는 거구나 싶었다. 가구들은 다 어디로 옮겨 놓은 뒤 꼭 쓸 것만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기는 참으로 정직한 모양새였다. 줄도 몇 번 꼬여있었고, 색깔도 검은색 텔레비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에메랄드 색이었다. 나는 좀 사는 집이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휑한 거실의 행색에 또 혹시는 이내 부부가 사기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아파트에 잠시 자리를 잡아서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는 종적을 감추어 버리는. 그렇다면 내 20만원은. 아니 될 말이었다.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털어 내고 부엌에 들어선 내 눈에는 멀쩡한 가스렌지를 두고 굳이 바닥에 머리를 맞대고 휴대용 버너 위에서 부추전을 부치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집은 원래 바닥을 좋아하는 집인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바닥에 놓인 텔레비전도 잘 시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딸아이는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씨익 웃어주었다. 유난히 아이의 발뒤꿈치가 눈에 띄었다. 맨들맨들 아주 깨끗했다. 자기 집이 아니라도 맨 발로 있는 건 한 여름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발뒤꿈치에 각질이 심한 나는 집 외에는 여름에도 꼭 양말을 신어야 했는데 그 깨끗한 발뒤꿈치를 보는 순간 사기단으로까지 의심했던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모든 생각을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었다. 발뒤꿈치가 깨끗한 사람은 깨끗한 집에서 순수하게 살 것이었다. 양말 속 내 발뒤꿈치가 가려움을 느꼈다.

아줌마는 가위로 우리가 먹을 부추전을 반듯반듯하게 오려주었다. 참 정갈한 솜씨였다.

나는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부추 지짐을 구웠고, 지짐은 꼭 오봉에 담겨져 나왔다. 반드시 오봉이어야 했다. 우리는 그것을 찢어 먹었다. 꼭 찢어먹어야 했다. 먼저 찢는 사람이 임자였다. 우리는 강하게 커왔다.

나흘 동안 내가 옮긴 사람은 2500명 정도였다. 남은 기간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집을 나와 편의점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12시까지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인상이 써졌다.

나는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한 번도 휴학 따위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갓 대학 1학년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휴학을 해달라는 집안의 부탁은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휴학도 별 것이 아니지만은 어쩐지 그냥 눈물을 한 번 흘려야 할 것 같았다. 휴학의 이유가 경제적인 이유였으니 나는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그건 아마도 아빠 탓이 큰 것 같았다. 아니면 엄마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네 남매 때문인 걸까. 물론 나는 그 이유가 결코 우리 남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빠, 엄마의 희생양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이 태였고, 태어났고, 세상에 나왔다. 우리는 8할 쯤은 아빠를 원망했고, 1할 쯤은 엄마를 원망했다. 나머지는 지지리 복도 없는 우리의 운명을 원망했고 좀 거창하긴 하지만 국가와 사회를 원망할 줄도 알았다.

휴학의 시작은 공장에서였다. 기왕 휴학한 마당에 경험이나 많이 해보자는 거였다. 사실 어줍잖은 지식으로 기술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것 밖에는 없기도 했다.

원래 공장이란 곳이 대학생은 잘 써주질 않았다. 곧 그만 둘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력서를 위조해서야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복학의 시즌이 왔다. 아빠는 공장에서 동료의 실수로 무너진 벽돌 밑에 다리를 깔리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아빠가 또 사고를 쳐서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경중을 떠나서 사건이란 일어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아빠는 병원에 입원을 했고 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학교를 가지 못했다.

복학을 준비한다고 모든 일을 마무리한 사흘만의 일이었다. 나는 사흘을 쉬고 또 다시 일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공장은 가고 싶지를 않았다. 그 때 구한 일이 지금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두 개의 과외와 주말에만 가는 백화점 아르바이트였다.

월요일 화요일은 중 1 남자아이의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고,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삑삑이를 찍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고 3 여자아이의 국어를 가르쳤고, 저녁에는 편의점에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백화점에서 옷을 팔았다. 내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수요일 오전과 오후였다. 그 시간에 나는 잠을 잘 수 있었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햇빛이 따가워지려는 무렵에 중 1 남자아이의 엄마가 나를 불렀다. 이제 과외 대신에 학원을 보내볼까 한다며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건 해고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공장에서 1년을 일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게 왜 해고의 이유가 되는 건지 몰랐다. 여름 방학이 되면서는 고 3 여자아이마저 합숙학원으로 들어가고 나는 모처럼 시간이 남아났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여유롭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엄마나 아빠나 군대간 오빠나 시집간 언니나 같이 사는 언니나 모두 내가 언제 다시 일거리를 잡나 하는 마음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백화점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며칠을 불편하게 보내던 중에 구한 아르바이트가 사람 옮기기였다.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이 좋은 아르바이트를 위해 내게는 과외들이 그렇게 떨어져 나갔나 보았다.

밤이 늦어서 모든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자연스럽게 인상이 써졌다. 하루하루 내게 버겁지 않은 날은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니 언니는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언니는 경리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마우스는 그 집에 있는데 언니는 어떻게 컴퓨터를 하고 있는 걸까. 언니는 괜히 여상을 나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우스가 없어도 컴퓨터는 할 수가 있는 거였다. 대신 손가락들을 기이하게 놀려야 했다. 이 키와 저 키에다가 요 키를 누르면 죽어있던 창이 활성화되고 저 키와 이 키와 그 키를 누르면 이리 저리 단추들의 색깔이 짙어졌고, 짙은 색일 때 엔터를 누르면 되었다. 뭘 모르는 나로서는 언니의 기술이 놀랍기만 했다. 적어도 내게 언니는 고급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귀찮기는 한 모양인지 마우스를 어쨌냐고 화를 내었다.

그랬다. 우리 집은 이렇게 고급기술을 사용하는 언니도 있었고 아빠도 계속 일을 했고 엄마도 일을 했고 시집간 언니도 시집가기 전까지 일을 했고 군대 가있는 오빠도 군대가기 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모두가 일을 했다. 낭비도 하지 않았고 월급을 받는 족족 집에 다 들여 주었다. 아저씨 혼자 일을 하는 그 집은 어떻게 56평의 번드르르한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왜 이렇게 모두가 열심임에도 불구하고 월세살이를 못 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의 현란한 손놀림에 넋을 잃었던 나는 언니에게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회사일. 언니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한다고 얘길 해주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메모장이었다. 하필이면 그 때의 언니는 어떤 프로그램의 데이터를 메모장에 옮긴 뒤에 다시 엑셀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청업체들과의 거래내역인 것 같았다.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엑셀에서 메모장에 있는 자료를 불러내어 칸을 조절하고 엔터를 치니 각 항목들이 칸 안에 예쁘게 들어가 앉는 거였다. 순식간이었다. 한 번에 2만 명도 거뜬하지 않을까. 맙소사. 이런 놀라운 기능이 있다니. 나는 빛을 보았다. 쿵쾅되는 가슴을 진정하고 언니에게 넌지시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 방법을 터득했다. 물론 언니는 마우스가 어디간 거냐고 또 다시 물었다. 나는 곧 가져온다는 말만 했다. 집에는 내가 번 돈을 모두 주어야 했지만 어떻게 벌고 있는지는 2년 째 휴학하고서는 그 누구도 묻지를 못했다. 나는 가엾은 고학생이기 때문이었다. 혹은 어떻게든 벌기만 하면 되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식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 말보다 더 딱 맞는 말도 없는 것 같았다. 다 필요 없었다. 천군만마였다.

닷새가 되는 날 나는 아파트 12층에서 에어컨 바람의 시원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벽 너머에는 여전히 학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아줌마에게 소곤소곤 거리고 있었고 아줌마도 딸아이에게 같이 소곤소곤 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그 말이 궁금하지 않았다.

일단 언니에게 전수 받은 대로 할 수가 있는 건지 시험을 해보았다. 사람들이 주욱 들어 앉은 창 안에서 나는 영웅과도 같은 기분으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내가 간다고 외치고 있었다. 언니는 마우스 없이도 했는데 나는 마우스까지 있지 않은가.

역시나. 되었다.

차질 없이 진행이 되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10분 안에 이 일은 끝낼 수가 있다. 하지만 2주에 20만원이 아닌가. 이제 1주일인데 벌써 끝내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괴로웠지만 나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타협 끝에 나는 어제까지의 2400명에서 오늘은 그 수의 반만큼만 더 옮기기로 했다. 그래도 그 전과의 속도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가 아닌가 말이다. 인간으로서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건지 괴로웠다. 하루아침에 전세는 역전되어 있었다.

괴로움도 잠시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날짜를 채우고 돈을 받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굳이 진실을 알리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을 거라고 합리화했다.

오전을 보내고 오후가 되자 아줌마는 또 나를 불렀다. 점심을 먹자는 거였다. 이번에 아줌마가 컴퓨터 가까이 왔을 때도 나는 긴장이 되었는데. 혹시 너무 빨리 번호가 지나가 있는 것을 보고 뭐라 하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다행히 아줌마는 컴퓨터를 보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밥을 기다리는 중에 나는 딸아이에게 학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왔냐고 물어보았다. 영어를 배우고 왔다고 했다. 나는 헐리우드 액션으로 감탄을 하며 무슨 단어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에.인.지.얼. 딸아이는 또박또박 말을 했다. 발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렇구나. 천사를 가장 좋아하는구나. 나는 왠지 그 단어를 내 입에는 담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줌마는 딸아이와 나에게 밥과 카레가 담긴 별이 박힌 접시를 내 놓았다. 김치며 피클도 조금씩 얹혀있는 접시였다.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냄비 째 카레를 내주었다. 밥은 보시기에 퍼주었다. 우리는 국자로 카레를 덜어먹었다. 냄비에는 손잡이에 얼마간의 찌든 때가 끼어있었고, 국자에도 손잡이와 뜨개 사이에는 닦아도 지지 않을 때가 있을 줄을 알았다. 고춧가루가 말라붙은 반찬통에는 김치가 담겨 있었고 우리는 쉬지 않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놀렸다. 우리는 뭐든지 맛이 있었다.

딸아이는 몇 알 안 되는 밥알을 천천히 꼭 꼭 씹어먹었다. 나도 그럼 한 입. 그런데 카레 맛이 이상했다. 이건 카레가. 아줌마도 자리에 앉아 카레를 먹었는데 넌지시 카레의 비법을 알려주었다. 카레는 물 대신 우유로 끓인 거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아이들이 받아먹는 우유급식이 너무 부러워서 하나를 훔친 적이 있었다. 오전반을 마치고 집으로 갔을 때 아무도 없는 빈 집에 아빠는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나는 아빠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곧장 옆방으로 갔다. 우유를 훔친 죄책감으로 인해 나는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먹어보고 신청하라고 우유를 주었다면서 아빠에게 우유를 내민 것이었다. 그 우유는 내 헌납으로 인해 아빠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나는 우유를 못 마시게 되었다.

나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것을 느꼈다. 아줌마는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를 않았고 나는 작업을 적당히 마무리하고 집으로 오게 되었다. 몸은 괴로웠지만 마음은 좋았다. 거짓으로 꾸며서 그 집에 죽을 치고 있지 않아도 되었고 곧 두드러기는 사라질 것을 알았으니까 말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을 옮기는 일이 너무나도 버거웠기 때문에 백화점에는 사정을 하고 주말에도 아파트로만 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던 나였다.

하지만 두드러기가 나서 온 몸을 긁으면서도 나는 여유로울 수 있었다. 20만원을 받으면 15만원 받았다고 속이고 5만원만 어디 나를 위해 쓰면 안될까 하는 유혹이 나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나는 그 비슷한 일도 못했다. 최대한 집에 많이 들여주고 빨리 빚을 갚아 버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담아도 담아도 새는 독 같았다. 화수분 반대. 그 말이 딱 맞았다. 사실 빚을 갚는 데 5만원은 티도 안 나는 돈이었다. 나를 위해 써도 될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한 시간을 있으니 두드러기가 가라앉고 나는 다시 멀쩡해졌다.

월요일이 되었다. 날은 여전히 더웠고 거리에는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 시원한 곳에 다들 몰려 있는가 보았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엘리베이터의 단추 12를 눌렀다. 12층에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줌마는 딸아이의 학원에서 여름방학맞이 물놀이를 가는데 같이 갔다는 거였다. 아저씨는 오늘 월차를 내고 집에 있는 중이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신경 쓰는 건 오히려 아저씨인 것 같았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아저씨는 막 컴퓨터를 켜고 앉은 내게 주스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는 몇 명의 사람들이 옮겨졌나 살펴보았다.

아.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그때 아저씨를 속이는 중이었으니까. 아저씨는 옮겨진 사람이 3100번까지임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몇 명 못했기 때문에 내가 민망해하는 것으로 알고 괜찮다며 금요일까지는 하겠냐고 묻고는 자리를 떴다. 예. 할 수 있고 말고요. 나는 속으로는 너무도 당당했지만 무안한 얼굴로 열심히 하겠다고만 말했다.

여유가 생기니 이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들은 정말 요란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름은 장지갑과 복분자였다. 이춘삼, 김말복, 한꽃님이나 권아름드리는 오히려 식상했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몰랐다. 주소가 중복되는 건 한 가족일 것이었다. 어쩌면 주인집과 세 들어 사는 집인지도.

작업은 아무리 더디게 해도 금요일 안에는 끝을 낼 수가 있었기에 나는 수요일까지 1만 4천 명까지는 옮겨 놓을 생각이었다. 100명씩 끊어서 메모장에 옮기고 엑셀로 가서 메모장의 사람들을 건져 올렸다.

점심은 아저씨가 차려주고 나 혼자만 먹었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쩝쩝 소리는 내지 못했다. 다만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집 곳곳을 탐색할 수 있었다. 에어컨과 쿠션이 놓여 있는 2인용 소파와 내가 있는 시간 동안은 한 번도 켜진 적이 없고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있었다. 아저씨는 안방에 있었고 안방 겉벽에는 액자가 두 개 걸려 있었다. 액자에는 연필로 그려진 볼이 홀쭉한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각각 한 개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은 얇았고 약간 일그러진 모양새들이었다. 볼은 푹 들어갔고 눈은 날카로우면서도 퀭하게 그려진 그 여자와 남자는 내가 밥 먹는 것을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굴렸던 눈알들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저녁이 되어 가보겠다고 하자 아저씨는 안방에서 나왔다. 언뜻 본 안방에는 옛날에 한창 유행했던 자기로 봉황을 박아 넣은 검은색 장롱이 있었고 아저씨는 노트북으로 무언가 작업을 하던 중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상적인 모습에 곧 이사를 갈 집도 방금 이사를 온 집도 아님을 확신했다. 하지만 거실의 모습은 여전히 찜찜했다. 가족의 공간이 아닌 것 같았다.

아저씨는 내게 수고했다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데 아마도 이 일을 11월에도 한 번 더 해야될 것 같다며 그때도 혹시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했다. 불러주시면 저야 고맙죠. 진실이 밝혀지지만 않는다면 내게는 이 일만큼 멋진 일이 없었다. 백화점도 그만두고 이 집에서 사람들만 옮겨주고 싶었다.

나야 2주안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확보한 상태라 당당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만, 아저씨 입장에서의 나는 나흘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1만 명도 다 옮기지 못한 더딘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을 텐데 나를 다시 써주겠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다.

드디어 마지막날이 왔다. 이제 에어컨 바람과도 안녕이었다. 나는 또다시 후텁지근한 바람만 불어대는 우리 집 선풍기에게로 가야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층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보이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었다. 첫날 12층 창 밖으로 내다보았던 푸르던 산은 이제 한 여름 찜통 더위에 곧 타버릴 듯 지쳐 보였다.

아줌마는 여전히 두드러기 걱정을 해주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소심한 아줌마 성격에 많이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아줌마는 방 근처에 오지도 못했고 에.인.지.얼.을 멋지게 발음하는 딸아이를 들여보내 나의 점심을 물었다.

2주 동안이었지만 이런 호사스러운 아르바이트를 내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20만원을 받으면 꼭 1만원은 비법을 전수한 언니를 위해 쓰리라 다짐했다.

점심을 먹고 나는 저 밑에서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12층 아파트에 앉아 컴퓨터를 끼고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일을 하면서 마지막이 될 에어컨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더위에 고생할 엄마와 아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공으로 받는 것 같은 이번 일의 수당을 또 얼마간은 엄마 아빠를 위해 쓰리라 생각할 수밖에.

마지막날까지도 아파트는 조용했다. 여전히 아줌마와 딸아이는 부엌에서 뭐를 하는지 소고소곤거렸고 나는 꿈결처럼 마치 이 가정의 일원이 된 것 마냥 평화로웠다.

엄마. 물 좀. 하면 언제든지 소곤거리던 엄마가 나를 위해 별이 박힌 컵에 정수기의 물을 받아서 컵 크기에 꼭 맞는 사각 쟁반에 받쳐 가지고 올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도닥거려 주고 나는 먼 산을 한 번 바라본 뒤 엄마와 다시 눈을 맞추며 웃어주는 거였다. 안방에는 아빠가 안마기로 더 휴식이 필요한 다리를 맡기고 있고 언니는 제 방에서 제 컴퓨터로 경리가 아닌 전문 직업인으로서 전문적인 일을 하는 거였다. 그때 마침 오빠는 까만 얼굴로 충성을 외치며 여름휴가를 나오고 시집 간 언니는 갈비를 사서 형부와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하면 되는 거였다.

메모장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제 주소의 집에서 편안하고 쾌적한 여름날 오후를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시원한 여름을 없을 거였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거였다.

그런 상념들 때문인지 여유롭게 100명씩 옮기던 나는 몇 번의 실수를 했다. 오늘은 좀 일찍 이 아파트를 나서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혹시 다 된 밥에 재를 빠뜨릴까 싶어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작업에 돌입했다.

19500번까지 했을 때 실수를 했기 때문에 19401번부터 다시 옮기기로 했다. 남은 사람은 600명이었다. 600명의 사람들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메모장에 저장을 하면서 작업을 했지만 저장한 것을 다시 볼 일이 없을 단순한 일이었지만 실수한 이상 어쩔 수 없이 19401번부터 19500번의 사람들을 맡아주었던 저장공간으로 들어가 불러올 생각으로 메모장의 저장 단추를 눌렀다.

이상했다. 19401이라는 이름의 저장물 밑에는 19400이라는 저장물이 있었다. 나는 1번부터 100번까지 끊어서 저장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 번호가 생겨날 리가 없었다. 갑자기 머리위로 찬물이 흐르고 등줄기로 칼날이 내려긋는 것 같았다. 그때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런 말은 식상했지만 그런 말밖에는 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전에 일을 했다는 그 아르바이트생의 흔적인 것 같았다.

맙소사였다. 그 녀석도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거였다. 번호는 9500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한 작업은 2401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쨌거나 내가 더 이득을 보았고 내가 더 오랜 기간 약았었고 내가 더 오랜 기간 부부를 속여왔다. 하지만 우리는 공범이었다. 단지 내가 조금 빨리 사람들을 옮길 수 있는 방법 그 진실을 안 것뿐이었다.

그 녀석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나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을 속여 15만원을 받아낸 것일까. 나는 귀까지 벌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부부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더 이상 뜸을 들일 일 없이 제 속도대로 나머지 600명을 2분 안에 옮겼다.

아줌마에게 갔다. 다 했다고 말했다. 내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아줌마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벌써 다 하셨냐고 물었다. 나는 액자 속에 있는 남자 여자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 금새 환한 얼굴로 돌아온 아줌마는 이렇게 빨리 하실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신랑이 거짓말을 했더군요. 사실 전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은 3주만에 일을 마쳤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일을 끝내주시는 걸요.

아줌마는 그러면서 그 사람에게 왠지 속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3주 동안 20만원을 받아갔다고 했다. 2주를 기한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1주일이 지나고 2주 째가 시작되는 월요일에 도저히 안되겠다고 1주일을 더 부르더니 20만원만 받겠다고 했다는 거였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어서 그 집을 나오고 싶었지만 일찍 끝났는데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아줌마는 나를 끌어 앉혔다. 갑자기 아줌마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저 자신감. 모든 것을 알고 아량을 베푸는 듯한 저 당당함. 여유로움. 내 착각일 거였다. 나는 식탁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자꾸 액자 속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때까지 아줌마는 혼자서 말을 이어나가는 재주를 가진 것을 숨겼던 것 같았다. 자신이 그린 거라며 벽에 붙은 그림을 가리켰다. 그 여자와 남자였다.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나온 뒤에 남편을 따라 지금의 곳으로 오게 되었고 결혼하고 어쩌다보니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렸던 것이 그 액자 속 그림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도 아줌마는 무슨 얘길 한참 했는데 자신들은 아주 검소한 걸 좋아한다는 것과 많이 아끼고 살면 아가씨도 금방 자리 잡을 거라는 그런 말이었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었지만 그때 굳이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줌마는 잠시 기다리시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줌마가 안방으로 들어간 뒤에 나는 나를 보던 액자 속 사람들과 눈싸움을 했다. 하지만 아줌마가 안방을 나올 때 나는 눈길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는 20만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물론 돈은 그 자리에서 확인하지 않았다. 딸아이가 크레파스를 손에 쥔 채 방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배웅하는 것을 보았지만 현관을 나오는 내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사람들이 두려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를 나오고 말았다.

여름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건 찜통도 가마솥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더위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받아들이고 나니 땀이 나는 것과 더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곧장 백화점으로 갔다. 그냥 그 돈을 빨리 쓰고 싶어서였다. 우선 나를 위해, 내 발뒤꿈치를 위해 나는 양말을 선물했고, 케이크도 사고 가족들의 선물도 샀다.

2층 가전제품 코너를 지날 때였다. 그제서야 56평 아파트에 외롭게 홀로 두고 온 우리 집 마우스가 떠올랐다. 어쩐지. 아까운 게 아니었다. 미안할 뿐이었다. 버려두고 올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어쨌든 나는 새 마우스를 샀다. 편의점에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우리 집 선풍기 앞에서 나는 가족들을 기다렸다. 이 돈이 다 어디서 났느냐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그냥 입을 닫았다. 우리는 그 날 저녁 이유도 모른 채 행복했다. 나를 위해 또 우리 가족을 위해 큰 돈 15만원을 고스란히 써버린 나는 남은 5만원만을 언니에게 줄 수 있었다. 5만원은 우리 가족의 빚을 갚는데 들어갔을 거였다.

그런 거였다. 돈이야 벌면 되는 거였고 빚은 갚으라고 있는 거였다. 나도 복학을 할 수 있는 거였고 아껴 쓰고 저축하고 알뜰한 생활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11월이 왔다. 아저씨로부터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순간 나의 눈에 들어온 건 그네들이었다. 인사를 해야되나 말아야되나 잠깐 갈등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네들은 내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별로 웃고 싶지가 않았는데 웃고 있었고 오히려 그런 나를 본 아줌마, 아저씨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아줌마는 어느새 표정을 바꾸고 대학가 근처에 맛있는 집이 많아서 종종 저녁에 외식을 하러 온다고 했다. 아줌마에게는 이런 것이 내게 가르쳐준 아껴 쓰는 요령인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연락을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남의 마음은 알 수가 없는 건데 나는 내 마음은 다 들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 주어서 너무 고마웠는데 그 말을 듣고 순간 뜨끔했다. 아줌마는 말이 끊기자 서둘러 에.인.지.얼.을 앞세우고 자리를 뜨려고 했고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녕히 가세요. 어색하게 웃으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떠나가는 한 가족의 뒷모습은 묘한 그림이었다.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정지해 있었다.

2500원짜리 김치찌개를 파는 식당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들어가자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친구들 옆으로 난 구석자리에는 금방 밥을 먹고 나갔는지 깨끗하게 비워진 찌개 냄비와 수저 세 벌, 밥그릇 두 개가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봄이 왔다. 집에는 아직 더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나는 복학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느라 분주했지만 친구들과는 깔깔대며 캠퍼스의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그 해 여름의 일들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었다.

[당선소감] 윤은진(국어교육 4)

여유가 있을 때는 쉽게 손이 가지 않던 일인데 시험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 싶어서였을까. 내 인생의 큰 시험을 앞두고 나는 글이 쓰고 싶어졌다. 임용고시가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글을 한 편 쓰지 않고서는 임용이라는 큰산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숨어서 글을 썼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다른 일에 정신을 쏟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쓰느라 어색하기만 한 문장들과 어설픈 단어들을 애써 외면하고 마감 직전에 공모를 했다. 시험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 생긴 허무감은 다듬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글의 존재도 망각하게 했다.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외면하고 있던 글이 기특하게도 가는 숨을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마산에서 보기 드물게 한낮에 눈이 쏟아지던 날에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기쁨이 큰 만큼 부끄러움도 컸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한 글인 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친 내 글에 조언을 해준 셋째 언니와 뽑아주신 명형대 교수님, 당선을 같이 기뻐해 주고 축하해준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린다. 무엇보다도 골방에서 쓰여진 것 같은 내 초라한 글에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심사평] 명형대 교수(국어교육)

"도식적 단순성을 내적갈등으로 완화, 형식미 고려를‥"

10·18문학상 소설부문 심사 대상 작품은 모두 4편이다.

그 중에서 '그 해 여름'을 당선작으로 민다. 이 작품은 조세희의 '난쏘공'같은 부자/가난한 자, 부/가난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조금은 도식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알바생'의 돈에 대한 갈등을 심층으로 배치하여 사회적 문제에 더한 내적인 갈등은 단순성을 다소 완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적 결정체로서의 단편소설이 가지는 형식미에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회상의 이야기는 그것이 일상의 논리보다는 은유나 환유의 심리적 연상에 따르게 하는 것이 좋다.

'원을 그리는 아이'나 '소년 기행 동화'는 성장소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지식, 설명을 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현대소설은 작가나, 텍스트에서보다 독자가 참여한 독서작용에 의한 소설 해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술에 민주화의 이데올로기가 미친 한 영향일 것이다. '기억하라'는 신춘소설의 공식처럼 과장과 극대화한 사건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러나 단편소설에서 대중소설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응모작들이 모두 예년에 비하여 문장이 좋고 앞으로 더 정진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비슷한 수준이나 소설의 정도를 밟고 있는 '원을 그리는 아이'를 추김상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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